역사는 광기에 휘둘리곤 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이름이 참 좋다. 이 사건에서 정치 광기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는지 확인하게 된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운동이다.
사회주의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명분으로 내걸고 국가 권력의 용인하에 저질러진 폭력과 테러행위였고, 점점 진행될수록 집단광기적인 성격을 보이며 극으로 치달아 국가 시스템의 근간에까지 뒤흔든 사건이었다. 피로 얼룩진 중국 현대사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파란만장한 비극의 역사다.
문화대혁명의 실상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마오쩌둥이 실세로 등극한 류사오치(劉少奇)를 포함한 당권파를 숙청해 다시 최고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책략이었다. 당시 군을 장악하고 있던 마오쩌둥의 오른팔 국방부장 린뱌오(林彪)를 시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사회주의적 명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인민들을 선동, 권력 전복에 나선 것이다.
류사오치는 홍위병들에 의해 ‘주자파 (친자본주의적 인물)의 우두머리’ ‘반혁명분자’로 비판 받았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나 이듬해 정부에서 실각 당했다. 당에서도 제명돼 베이징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자체를 인민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이란 모양새로 꾸미기 위해 베이징 대학의 학생들을 선동해 학장과 교수들을 비판, 공격하게 만들었다.
홍위병의 활동과 마오쩌둥 지지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몰아세워 자아비판대에 오르게 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포함한 여러 정치인들은 홍위병의 대중집회에도 끌려나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홍위병의 온갖 수모를 겪던 류사오치는 결국 지방으로 쫓겨나 당뇨병, 폐렴 등의 지병이 악화됐으나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1969년 11월12일 사망했다. 또한 인민해방군의 혁명 개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주더(朱德) 원수는 홍위병들에게 잔혹한 공격을 당했다.
홍위병을 이용해 당권파를 실질적으로 실각시킨 마오쩌둥은 ‘탈권 투쟁’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체제 정비를 위해 군을 투입했다. 마오쩌둥으로서는 홍위병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1968년 말 홍위병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폭력보다 중국인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긴 건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학생이 스승을 때리는 등 인간성의 상실에 있었다. ‘류사오치의 추악한 영혼을 보라’는 대자보를 붙인 건 류의 딸이었다. 중국의 문학가 바진(巴金)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없는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이다.
자본주의 회복을 꾀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린 관료와 자산계급으로 분류된 지식인 등 150만 명이 박해를 받아 한을 품고 죽었고, 공묘(孔廟) 등 전통 문물이 파괴됐으며 국가경제는 거덜 났다.
증오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극단적인 정치 팬덤과 포퓰리즘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팬덤 정치는 시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켜 놓고, 인간관계를 증오와 혐오로 갈라놓고 뒤에서 자기들끼리 낄낄대고 있다. ‘정치성향이 다르면 밥도 먹기 싫다’는 사람이 40%나 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런 사회에서 정치와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하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정치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실은 우리는 상대편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배설 경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이 세상을 밝고 다정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소명을 버리면 우리들의 삶은 위험해진다. 팬덤정치는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없는 정치다. 우리에게 그런 정치는 필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