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참전하고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에 종사한 한국 여성들의 아픈 역사를 유력 외신이 재조명했다.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일 ‘미군 병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잔혹한 성매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자국 지도자들이 공모한 가운데 여성들이 강제, 속임수, 혹은 절망 속에서 매춘에 내몰렸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원래 기지촌이란 군부대 주변에 형성되는 상권과 주거지역을 일컫는 말이지만, 1953년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부대 옆에 늘어선 성매매 업소 집결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통용돼왔다.
NYT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과 다른 아시아 여성들이 일본에 의해 성노예로 강제로 끌려갔다”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계속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을 위한 특수 위안부 조직이 있었고,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을 위한 위안소도 있었다”며 “전후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군부대 주변에 지어진 ‘기지촌'(gijichon), 즉 캠프타운(camp town)에서 일했다”고 짚었다.
1975년 16살 어린 나이로 포주에게 팔려가 기지촌 생활을 하게 됐다는 박모(64)씨는 NYT 인터뷰에서 “미군 병사들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미국인들이 알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조모(63)씨의 경우 17살이던 1977년 세 명의 남자에게 납치돼 동두천 기지촌에 끌려오는 바람에 5년간 성매매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발레리나의 꿈도 포기하게 됐다고 한다.
최모(77)씨는 미군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혼혈아에 대한 차별이 두려워 수차례 낙태할 수밖에 없었다고 돌이켰다. 미군과 사실혼 관계로 생활하다 버려져 아이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작년 6월 기지촌 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연합뉴스
NYT는 한국 정부가 외화벌이 차원에서 기지촌 성매매를 조장했고, 실제 1970년 미 정부는 한국이 미군 주둔에 따른 성매매 등 사업으로 연간 1억6천만달러를 벌어들인다고 집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연 8억3천500만달러였던 것에 비교하면 상당한 액수다.
당시 국내 신문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가리켜 “불법적, 암적, 필요악”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달러벌이 역군”이라고 추켜세우는 등 이들 ‘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미군도 자국 군인들이 기지촌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보다는 한국 당국과 함께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성병 검사를 시행하고 등록증을 발급하는 등 관리하는 접근법을 취했다고 NYT는 설명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기지촌 여성 약 100명이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관리하고 성매매를 조장했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가 이들에게 300만∼700만원씩 배상해야 한다는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정부는 기지촌 내 성매매 방치·묵인을 넘어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며 “이들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나아가 성으로 표상되는 이들의 인격 자체를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NYT는 “한미동맹 등의 영향으로 한국은 기지촌 여성을 거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이는 일본 성노예 여성들 이야기보다 금기시돼왔다”며 “1992년 미군에 잔인하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윤금이 사건 이후 기지촌 착취 문제에 관심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NYT는 “이제 기지촌은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 쇠락하고 있다”며 “일부 여성은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하고 싶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