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1일 중앙일보 신문에 게재된 ‘삶 포기한 청년 급증은 민재 …방지대책 마련 시급’ 기사를 보고 놀랐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청년 자살률이 이토록 많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살기가 어렵다고 살아보지도 않고 아까운 젊음을 포기하는 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금물이다.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몇끼를 굶어보았느냐고? 그 고통은 겪어 보 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때를 살아본 95살의 나는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다. 덜 여문 나락벼를 긁어모아 찐쌀로 만들어 먹던 일, 보리가 익기 전에 당하는 보릿고개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조상들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물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을 뒤집으면 풍요로움을 만들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준다. 그 가난이 오늘날에 한국을 세계 10위권의 나라를 만들었다.
이 세상에는 항상 양지와 음지가 있다. 낮에 태양이 있기에 만물이 자라고 밤이 있기에 무리가 쉴 수 있다. 비가 매일 오면 우리는 살지못할 것이다. 그러나 비가 와서 우리가 곡식을 심고, 그 식물이 성장하면 무리는 먹고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은 나의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그 대신 거기에는 갖추어야할 기본이 있다. 성공하고 싶으면 첫째 정직해야 한다. 둘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셋째, 목표를 정확히 세워야 한다. 넷째, 목표를 세웠으면 모든 힘을 내어 정상을 향해 나가야한다. 필자는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라도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필자만큼 가난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포수였고 독립운동가였지만 하지만, 우리 아버지 형제는 누구도 글을 모른다. 농사뿐인 그 시절, 가장이 없는 우리 가정은 우리 할머니가 줄줄이 자라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다. 큰아버지가 거름으로 쓸 똥장군을 등에 지고 동리어귀까지 가면, 그 다음부터는 할머니가 똥장군을 바꾸어지고 가서 농사를 지었다.
나는 일제치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중일전쟁, 2차대전, 8·15 해방, 한국전쟁, 5·18 군사혁명을 모두 겪고 1975년 이곳 미국으로 이민왔다. 미국에서 화학공장을 경영하다가1978년 3월 29일 밤 작업 중 화재가 발생해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이곳 애틀랜타 클락 칼리지 인근에서 식품점을 경영했다. 그러나 1992년 5월 2일 흑인 폭동으로 재산을 다 잃고 죽을 뻔도 했다. 나는 애틀랜타 시정부를 상대도 4년6개월 동안 소송을 해서 승소를 거뒀고, 미국에 사는 소수민족 보호법의 판례를 남겼다.
이런 나의 인생행로를 희망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95살인 내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혹시 미국에도 방황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꿈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돕고 싶다. 삶이 힘든 젊은이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언제든지 전화(404-547-5679)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