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서 소아종양 전문의로 큰 명성
한국학교 교장 등 한인사회 봉사도 열심
은퇴 후 시 쓰고 역사 인물 연구에 매진
“윤치호 친일 행적 떠나 균형 평가 필요”
최근 한국에서 부쳐온, 막 출간된 책을 한 권 받아 읽었다. 구한말 지식인이자 최초의 에모리대 유학생이었던 좌옹 윤치호(1865~1945)의 일기를 읽고 분석한 책 ‘윤치호 선배를 기리며’이다. 윤치호는 애국가의 유력한 작사자로 알려졌지만, 드러난 친일 행적 때문에 평가가 곤혹스러워진 인물이다. 책의 저자는 애틀랜타한국학교 2대 교장을 역임한 올드타이머 시인이자 에모리대 의과대학 명예교수인 김태형 박사(83)다.
김 박사는 서울대 의대 졸업 후 공군 군의관을 마치고 1966년 미국에 왔다. 보스턴, 뉴욕 등지에서 수련의를 거친 뒤 1978년부터 에모리대 의과대학에서 20년간 간 소아 종양 분야 연구와 진료로 명성을 쌓았다. 1997년 서울 아산병원 초청으로 서울로 돌아가 8년간 골수이식 전문 뇌 센터를 이끌었고, 2005년부터는 국립암센터에서 3년을 더 일한 뒤 2008년 다시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한국에 있는 동안 소아 뇌종양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조혈모이식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또 아산병원 퇴직금으로 자신의 호를 딴 ‘아해 우수연구상’을 제정해 소아 뇌종양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인 연구자를 선정,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김 박사의 호 ‘아해’는 아침 해라는 뜻이다.
지난 10월 14일 중앙일보 회의실에서 김태형 박사를 만났다. 의대 교수에서 시인으로, 또 문제적 인물 윤치호 연구가로 변신한 배경을 들어봤다.
– 윤치호는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쓰게 됐나요?
“좌옹 윤치호는 1890년부터 3년간 애틀랜타에서 공부한 에모리대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이었습니다. 에모리대학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으로서 ‘선배’ 윤치호에 대한 관심은 당연했습니다. 부임 초기 저를 환대해 주고 윤치호 일기를 소개해 준 에모리대 레이니(Laney) 총장과의 인연도 있었고요.”
-윤치호 일기는 어떤 내용인가요?
“윤치호는 1883년부터 평생 일기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한자로, 1887년부터 1889년까지는 한글로 쓰다가 1989년 12월부터 영어로 썼습니다. 50년 이상 쓴 그 영어 일기가 지금 에모리대학에 소장돼 있습니다. 한 사람이 50년 넘게 꾸준히 일기를 썼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역사적 유명 인물과의 관계, 시대 상황 등이 소상히 담긴 기록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조선 왕들의 일기인 일성록이나 이순신의 난중일기처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도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 일기를 통해서 본 윤치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구한말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영어는 물론 일본어,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프랑스어까지 익힌 어학 천재이기도 했어요. 미국 5년 유학 후 조선으로 돌아가 서재필·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었습니다. 국권 침탈 후엔 구속된 민족 지도자 석방에 앞장서다 투옥까지 됐고,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계몽과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윤치호의 호가 좌옹(佐翁)인데 ‘도와주는 늙은이’라는 뜻입니다. 뜻 그대로 윤치호는 평생 누군가를 도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살펴야 했고 일본에 협조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친일로 낙인 찍힌 사람이지요.”
친일의 업보는 무겁다. 한 번 친일파로 몰리면 비겁자,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어떤 이유로도 헤어나기 힘들다. 문학, 예술,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아까운 사람들이 무더기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져야 했던 이유다. 3.1 운동을 외면했고, 창씨개명까지 한 윤치호도 단죄의 그물을 비껴갈 순 없었다.
– 한 사람의 평생을 무 자르듯 이쪽이냐 저쪽이냐 딱 잘라 평가하기란 참 힘든 일이긴 합니다. 윤치호같이 우리 근현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식민지 시대는 복잡한 시대였습니다. 안창호나 이승만처럼 해외로 나간 사람은 독립투사로 남았지만, 국내에 남아 일제의 눈치 보며 나름 헌신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변절자로 몰렸고 결국 친일파로 낙인찍혔습니다. 일기를 읽어보면 윤치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현실 안에서 민족의 안위와 갱생을 도모해야 한다고 보았던 거지요.
그의 친일이 옳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윤치호의 경우는 자기희생적 면이 많았기에 친일이라는 말보다는 실용적 용일(用日) 또는 전략적 용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역사가도 아니고 전문 연구자도 아니지만, 책을 쓰면서 앞으로 윤치호 연구가 좀 더 활발해져서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균형 있게 평가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에모리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서명이 있다.
–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셨는데요.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연구는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공식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955년에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에서 표결에 부쳤지만 ‘윤치호가 맞다 11표, 아니다(기권) 2표’로 나와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자 미상으로 남았습니다. 그런 결정 이면에는 윤치호로 대표되는 기호파와 안창호를 추종하는 서북파의 기 싸움이 크게 작용했고, 윤치호와 악연이 많았던 위원장 최남선(기미독립선언문 작성자)의 의중도 일부 작용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가 친필로 남긴 애국가 가사입니다. 지금 에모리대학에 소장돼 있는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하기 전 셋째 딸에게 써 준 것이지요. 여기에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최근 작고한 연세대 김동길 교수의 증언도 주목할 만합니다. 김 교수가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한 김활란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인데, 해방 후 개성에 은둔하고 있는 윤치호를 찾아간 김활란에게 ‘나를 친일파로 모는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 내가 지었다고 말하지 말아요’라며 당부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윤치호 작사설 외에도 안창호설, 집단창작설 등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다. 거기다 작곡자 안익태까지 친일 논란에 휘말려 있는데다 가사 내용의 소극성, 수동성을 문제 삼아 아예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치호 작사설이 인정받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디. 김태형 박사는 “그래도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서 “친일 행적이 있다 해서 애국가 작사자를 바꿀 수는 없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 책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김 박사님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보겠습니다. 마라톤을 열심히 하셨다면서요?
“48세 무렵부터 뛰었습니다. 지금까지 풀코스를 36번 완주했고 보스턴 마라톤에도 3번 출전했습니다. 제가 73세 때인 2012년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했는데 당시 355명의 조지아 참가자 중에서는 최고령이었습니다. 덕분에 AJC 신문에 대문짝만한 인터뷰도 실렸었죠. 마라톤 덕분에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땐 성화 봉송도 했고, 당시 KBS TV에서 마라톤 중계 해설도 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뛰지 못해요. 3년 전 폐암 수술을 받았거든요. 대신 요즘은 아침마다 꼭 걷습니다.”
김태형 박사가 2012년 보스턴 마라톤 조지아 최고령 참가자로 소개된 미국 신문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은 부인 김경숙씨.
– 은퇴 후 문학활동에 심취하면서 시인으로도 등단하셨는데.
“고교 때 문리대 국문과를 꿈꾸었을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어요. 부모님 뜻을 좇아 의대로 진학하긴 했지만요. 이제 은퇴하고 나니 다시 옛날 기질이 되살아 난 것 같아요. 원하던 책도 마음껏 읽고 간간이 시도 쓰는 일이 즐겁고 좋습니다.”
김 박사는 한국에서 ‘월간 신문예’를 통해 등단한 후 활발한 시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9월 한국 방문 때도 자전적 삶을 돌아본 시 ‘길’을 발표, 호평을 받았다.
“재봉틀 머리에 인 엄마를 따라나선 6.25 피란길 / 그때 울음 울며 따라오던 꼬마 동생 생각난다 / 4.19의 핏빛 함성 귀 뚫던 청와대 가는 길목 / 탱크와 마주치던 학우들 생각난다 // 산타아고, 카일라스 순례의 길 / 늘 ‘언제가는’에 있었으나 / 정치가 연예인의 레드카펫은 /눈에 담기지 않았다 // 얼굴엔 주름 깊어 / 자아를 찾아가는 길 / 산을 찾아가는 길 / 아직 보이지 않는구나, 너무 멀구나” (아해 김태형 ‘길’ 전문)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도 많이 하셨지요?
“애틀랜타한국학교와 오랜 인연을 맺었습니다. 1980년대에 제가 2대 교장을 했고 아내도 20년 넘게 교사로, 또 교장으로 헌신했어요. 지금도 부부가 함께 이사로 돕고 있습니다.”
아내 김경숙씨와는 보스턴 유학 시절 만났다. 이화여대를 거쳐 서울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한 김경숙씨 역시 수필가로 등단한 문인이다. 김 박사 부부는 한국학교 졸업생을 위해 매년 장학금을 전달해 왔고 작년에도 온라인 수업 기기 마련 기금 및 건축 기금으로 1만8500달러를 기부하는 등 지속적인 후원을 하고 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책을 내셨는데 출판기념회라도 해야 하지 않나요?
“책을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초판은 이미 한국에서 거의 다 소진이 됐어요. 애틀랜타에선 그냥 가까운 지인들과 나눠 읽으며 조촐한 품평회 정도로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역사적 사건이니 인물에 대한 평가도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김태형 박사는 이번 책을 통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예민한 사안이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원 사료에 근거해 목소리를 높인 김태형 박사는 ‘할 말은 하는’ 천상 지식인이었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