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오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꼬마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아이를 처음 본건 동네 공터였을 것이다. 그 시절 한 동네 아이들은 모두 집 밖으로 나와 넓은 공터에서 하루 종일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재미있었을까 싶은데 한번도 지루한 날이 없었으니 놀라울 뿐이다. 그 넓은 공터라고 하는 곳도 다시 기억해보면 집밖으로 나 있는 골목 어귀 일터이지만 어린 꼬마들에겐 뭐라도 하며 뛰어 놀기에 충분한 공간 이였다.
그 날도 밖에서 놀 생각에 신나게 나와 친구를 찾던 내 눈에 얼핏 봐도 나보다 키는 작고 얼굴은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손에 과자 봉지를 들고 조용히 우리를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됬다 싶어 나는 그 아이 한테 다가가서 무슨 선심 쓰듯 같이 놀아 줄 테니 과자 좀 달라고 했다. 그 아이는 얼떨결에 과자를 나누어 주고 그날부터 나와 친구가 되어 비가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함께 놀았다. 사실, 이 기억도 나의 것이 아니고 그 친구의 것이다.
그렇게 그 친구와 나는 한동네에서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고 대학때가 되어서 각자의 진로에 의해 떨어져 있었지만 아무리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내다 가도 문득 생각나 연락하면 언제 떨어져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참 잘 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릴 것도 숨길 것도 없는 편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미국에 나와 10년만에 한국을 다녀오게 되었을 때 그 친구와 나는 처음으로 서로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만났었다. 친구는 어렵게 얻은 딸이 하나 있고 나는 아들 녀석만 둘이다. 오래된 엄마 친구와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금방 친해져 오빠, 동생 하며 웃고 떠드는게 자연스러웠다. 남산타워를 향해 달리던 차 안에서 친구와 나는 지나온 추억을 끝없이 꺼내 떠들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이젠 우리의 아이들까지 그 추억에 함께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우리 큰아이가 신기하다며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재연이 이모와 지금까지 계속 연락을 할수 있었어요?” 그렇게 오래된 친구가 있는 것도 신기하고 이렇게 만나는 것도 놀라운 일이라고 하면서 재밌고 좋았다며 부럽다고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이모가 우리 돈 주셨어요”. 달러로 이백불씩 봉투에 넣어서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집에 돌아와 전화하니 그 친구말이 어릴적 내가 먹을걸 많이 사줬다고 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핫도그, 떡볶이, 아이스크림… 얻어 먹은게 많아서 나름 미안 했었고 고마워서 아이들 한테 주고 싶었다고 하니 새삼스럽고 우스운 소리 같지만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아이들은 다섯 살, 세 살, 그 나이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친구들을 사귀고 함께 지내 다가도 몇 년 지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하면서 오랜 시간 세월을 함께해온 편하고 그냥 좋은 친구가 없는 거 같아 마음이 짠 해졌다.
내 어릴 적 동네 꼬마친구 재연이는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세월을 함께 해 나가는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친구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만나면 새로운 추억으로 반추 되어 나오지만 그렇기에 깔 깔깔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된다. 세월이 함께 친구가 되어주니 더 없이 고맙고 소중하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세월이 묻어나는 친구가 있으면 세상 살이에 외로움이 덜 할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우정을 만들고 쌓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야 될 것이다.
남산타워를 오르며 어르신 여러분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다. “어쩜, 너희들 그대로니? 하나도 안 변했어 그대로야. 이게 얼마만 인데..” 아주 오랫동안 못 만나다 모였는지 어르신들이 개구진 목소리로 서로에게 반가움을 쏟아냈다. 그분들도 세월이 함께 친구를 지켜준 모양이다. 세월을 같이한 친구를 만난 날 우리는 함께 많이 웃었고 모두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