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쁨과 아픔을 그린 영화 ‘초원의 빛’은 60년대, 내가 본 영화 중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명화다. 부잣집 아들이자 미남이고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버드(워렌 비티 역)와 예쁜 여학생 윌마(나탈리 우드 역)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결혼 전까지는 선을 넘으면 안된다는 엄마의 간섭과 다른 여학생의 유혹에 빠저드는 버드 때문에 고민하는 윌마, 그녀는 수업 시간에 ‘초원의 빛’ 시를 낭송한다.
“초원의 빛이여/꽃의 영광이여/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다 한들…”
윌마는 읽다가 감정이 복받쳐 교실 밖으로 도망친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알게 된 의사의 청혼을 받은 윌마는, 첫사랑 버드의 집을 찾아간다.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대학에 갔으나, 식당 웨이트리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부가 된 버드를 만난다. 마당 흙먼지 속에서 닭과 노는 아기, 그리고 다시 임신한 버드의 아내의 불러온 배를 바라본 윌마는 조용히 그의 집을 떠난다. 버드는 창고 옆에 서서 멀어져 가는 윌마의 차를 바라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다 한들 어떠리/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오히려 우리는,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리’
워즈워스의 시가 흐른다.
내가 미국에서 바쁘게 살다가 한국에 갔을 때, 먼 친척 여동생 순자가 만나자고 했다. 6·25 전쟁 직후, 서울의 한 보건소 사무장이던 친척 덕분에 우리는 충청도 산골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영미 누님과 순자가 결혼할 때는 순박한 시골 처녀들의 떠들썩한 연애 소문이 있었다. 한국판 ‘초원의 빛’의 주인공들은 50여년 지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에 순자를 만나게 되었다.
난리 직후, 영미 누님이 서울에 올라와 보건소 간호원이 되었을 때, 한 헌병 중위가 영미 누님에게 사랑에 빠져 자주 보건소를 들락거리고 영화 구경도 같이 다녔다. 그 소식을 들은 누님의 아버지는 시골 청년과의 결혼을 서둘렀다. 누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그 중위가 시골 결혼식에 차를 가지고 와서 신부를 납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신부 아버지는 동네 청년들에게 지겟작대기를 쥐여 주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영미 누님의 결혼으로 빈 간호원 자리에 순자가 간호원이 되었다. 이번에는 공군 하사 한 사람이 순자에게 반해, 뻔질나게 구실을 만들어 보건소를 드나들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서둘렀다. 순자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오빠와 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했다. 별볼일 없는 공군 하사에게 순자를 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이도 어리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승낙을 안 해도 둘이는 결국 결혼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고급 음식점에서 만난 순자는 아름답고 건강하며 활력 넘치는 중년 여인으로, 대형 백화점 내 음식점 체인을 운영하는 재벌이 되어 있었다. 딸과 아들이 미국 명문 대학에서 약학 박사, 공학 박사 학위를 받는 동안 미국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고 했다. 순자 부부는 장학재단을 설립하려고 준비 중이라고도 했다.
“영미 누님은 어떻게 살아?” 하고 내가 물었다.
“영미 언니 죽은 지가 벌써 언제인데!” 그녀가 말했다.
서울 변두리 시장 노점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가난하게 살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죽기 전, 애를 업고 시장 길바닥에서 채소를 팔고 있을 때 첫사랑이었던 그 장교가 찾아왔다고 했다.
영미 누님의 첫사랑이 그녀를 못 잊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영미 누님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먼 발치에서 숨어 서서, 애를 없고 길바닥에서 채소를 파는 옛 애인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 갔을까. 아니면 서로 만나 인사라도 나눴을까. 영화 ‘초원의 빛’ 마지막 장면에서 윌마가 버드의 집을 찾아가, 밀짚모자를 쓴 농부가 된 버드와 흙마당에 앉아 닭과 노는 버드의 아들, 그리고 임신으로 불러온 배를 가진 버드의 아내를 바라보다 돌아서는 장면이 겹쳐진다.
“오빠랑 엄마가 반대했어도, 당당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지금은 행복하게 사는 순자가 참 장하고 이렇게 만나서 고마워.” 식당에서 마주 앉은 순자를 향해 내가 말했다.
“그땐 엄마 오빠 말 안 듣는 나쁜 년이었지 뭐.” 그녀는 빙그레 웃는다.
“영미 언니도 그때 열렬하게 사랑하던 그 장교와 결혼했어야 했는데… 언니는 너무 착했어.” 그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