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다. 꼭 필요한 걸 구하지 못할 때, 아쉬운 대로 비슷한 걸로 대신하는 경우 쓰는 표현이다. 떡국을 제대로 끓이려면 꿩고기 국물이 최고라지만, 꿩은 구하기 힘드니 닭으로 대신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 말이 뜻밖에도 미국의 ‘소셜 시큐리티 카드’와 꽤 닮았다.
몇 해 전, 이제 막 미국 유학을 시작한 유학상씨가 있었다. 미국 생활의 첫걸음은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었는데, 같이 온 동료에게 물으니 “소셜 시큐리티가 필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셜 시큐리티 카드가 필요하다니, 여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던 유학상씨는 당황했다. “그럼 유학생도 발급받을 수 있나요?” 하고 묻자, 동료가 말하길 “유학생은 소셜 시큐리티 카드를 못 받아요.” 그렇다면 면허도 못 딴다는 얘기냐고 되묻자, “소셜 시큐리티를 받을 수 없다는 확인서를 받아서 DMV(면허국)에 제출하면 돼요” 란다.
운전면허 하나 받는 데, 여권 외에 소셜 시큐리티가 왜 필요하고, 그것도 못 받는 사람에게 ‘못 받는다는 증명서’를 요구하는 시스템이란 도대체 어떤 논리인지… 유학상 씨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사회보장 카드’라는 게 왜 이렇게까지 복잡한 조건이 붙는 걸까?
사실 미국에서 소셜 시큐리티 번호는 사회보장제도 그 이상이다. 한국에는 주민등록번호라는 강력한 신분식별 번호가 있다. 하지만 미국엔 그런 시스템이 없다. 그래서 대신 ‘소셜 시큐리티 번호’가 신분증처럼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번호는 원래 세금을 추적하고 혜택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지만, 지금은 신분 확인의 거의 모든 영역에 사용된다.
은행 계좌를 열 때도, 직장에 입사할 때도, 보험에 가입할 때도, 학교에 등록할 때도, 심지어 전화나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할 때도 소셜 시큐리티 번호를 요구받는다. 본래의 용도는 사회보장 혜택 추적이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전 국민 신원확인 번호 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번호 하나로 그 사람의 인생이 열릴 수도, 도용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꼭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늘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다르다. 번호를 밝히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아이러니한 건, 정작 ‘소셜 시큐리티 연금’을 신청할 때조차 카드가 없어도 된다. 번호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연금 신청은 물론 대부분의 절차가 가능하다. 실제로 요즘은 카드보다는 번호 자체가 더 중요한 셈이다.
그런데도 조지아 같은 주에서는 운전면허를 새로 만들거나 갱신할 때 소셜 시큐리티 카드 실물을 꼭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영주권자든 시민권자든, 카드 실물이 없으면 면허국 직원이 접수를 안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땐 정말 ‘카드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싶지만, 행정 절차상 필요한 장치이니 별수 없다.
결국, 미국 사회에서는 주민등록이 없는 대신 소셜 시큐리티 번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꿩 대신 닭처럼 말이다. 한 줄 요약하자면, 이 카드는 단순한 연금용 번호가 아니라 미국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필수 키(Key)다. 미국에 오래 살 계획이라면, 이 번호의 무게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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