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에 내 일상에 충격파를 준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텍사스주에 사는 여고 동창생이 42년 결혼생활을 청산했다는 소식에 이어 다시 재혼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미시간주에 살던 대학친구는 오랜 이민생활을 끝내고 영구 귀국했다. 노년에 발휘하는 그들의 용기가 강한 파도로 나의 의식에 닿았다.
그런데 사람만 아니라 생활 환경도 한몫 했다.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새벽에 신문을 픽업하러 앞뜰로 나섰다가 이웃에 검은 연기가 피어 올라 가봤다. 세 집 건너 코너 집에서 불길이 번지며 검은 연기를 하늘로 뿜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오래 살면서 안면이 있는 집주인, 80대초 노부부는 길 건너에 망연자실 서 있었다. 다가가 안타깝다 인사하고 불이 난 사연을 들었다. 아침 일찍 교회에 가려고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는데 엔진에서 뭔가 퍽 터져서 놀란 부부는 얼른 차에서 내려 길 건너로 왔다.
소방차들이 몰려왔고 많은 소방관들이 집을 에워쌌다. 자동차에서 시작된 불길이 차고 위로 올라가 집안으로 삽시간에 번지는 것을 모두 두려움으로 지켜봤다. 별안간 불길이 지붕위로 치솟았고 불길을 잡으려고 집안에 들어갔던 한 소방관이 매연에 의식이 혼미하자 앰뷸런스가 왔다. 빠르게 일어나는 변화에 집주인 주위에 모인 이웃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교회 간다고 입은 옷 밖에, 그리고 노부인의 작은 핸드백에 든 물건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파손되었으니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를, 생활을 잃었다. 그때 노인이 하늘을 보고 말했다. “만약에 내가 차를 몰고 가다가 불이 났다면 우리 부부는 꼼짝없이 불에 타 죽었을 것인데 이렇게 살아 있으니 감사한 일이요.”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옆에서 그의 아내는 소리없이 울었다. 봄기운속에 암울한 죽음이 있었다.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지붕위로 너울대고 모든 창으로 검은 연기가 스며 나오는 정경을 보며 나는 뜰을 관리하던 노인을 기억했다. 구부정한 등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정원수를 다듬고 잔디를 깎다가 지나는 이웃들에 손을 흔들어주던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 것에 겁이 났다.
스페인에 가서 순례길을 두 번 걸은 후부터 나는 간단하게 산다. 핸드백 대신에 꼭 필요한 신분증과 핸드폰에 차 열쇠만 넣은 미니 크로스백을 사용한다. 중요한 서류나 은행 계좌 번호도 기억하지 못하고 핸드폰에 저장하지 않았다. 만약에 내 소유물을 모두 잃는다면, 나는 암담한 것만 아니라 처참할 것이다. 이웃집의 화재를 본 후부터 마음이 술렁인다. 유언장을 준비해 뒀듯이 비상시를 대비해서 사전에 어떤 대책을 마련해 둬야 한다는 압박감에 몰린다. 내 안에 두른 평온의 담에 금이 갔다.
여름이 다가와도 불에 탄 이웃 집은 검은 잔재로 멈춰 있다. 지붕 중앙이 폭삭 내려앉았고 검은 뼈대만 남은 차고를 통해 보이는 까맣게 타버린 집안은 지나갈 적마다 내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하지만 며칠 전 낯선 남자가 잔디를 깎는 것을 봤다. 어디선가 노부부는 이 집을 돌보고 있다.
나는 한 집에서 33년을 살고있다. 이곳에 있는 부대에 발령받아 와서 좀 살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어서 잠시 거주지로 구입한 집이다. 그런데 이 집에 아주 뿌리를 내리고 이웃들과 사귀며 오랜 세월을 산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서로 여러가지 의지하고 사는 건넛집 여인은 40년을 산 터줏대감이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몇 년 전에 재혼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녀가 남편을 내보내려 한다더니 주말에 작은 이삿짐 차에 백발의 남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실었다. 창문을 통해 그의 퇴출을 보며 나는 그가 준 명함을 버렸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막상 줄줄이 만난 일련의 사건으로 올봄 심적 파동이 컸다. 하루를 신중하게 살자 다짐하지만 무엇이든 아직 집중이 잘 안된다. 조금만 날씨가 궂으면 이곳보다 더 따스한 남쪽으로 이사하고 싶어하는 남편이 창가에 서서 굵은 빗줄기를 보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그리고 내 변화에 필요한 용기 대신에 지인들이 나의 의식에 하나씩 쌓아 올린 작은 돌 위로 소망의 돌 하나를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