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2일 반(反)유대주의 근절 등을 담은 교육정책 수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하버드대의 외국인 유학생 유치 자격을 박탈했다.
외교가에선 전날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 2명의 피살 사건 직후 나온 이례적 조치에 대해 “반유대주의에 대한 공세 기류를 더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부 장관은 이날 엑스(X)에 “하버드가 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 및 교환 방문자 프로그램(Student and Exchange Visitor Program·SEVP) 인증을 상실했다”는 글을 올렸다. 이어 국토안보부는 “하버드대는 SEVP 인증이 상실돼 더이상 외국인 학생을 등록받을 수 없고, 기존 유학생도 학교를 옮기지 않으면 법적 지위가 상실된다”고 이를 공식화했다. 미국 유학 비자를 받기 위해선 학교가 발급한 SEVP 인증이 필요하다.
국토안보부는 “하버드는 반미국적이고 친테러리스트 선동가들이 유대인 학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폭행하며 학습 환경을 방해하도록 허용”한 것을 SEVP 인증 상실의 이유로 들었다. 또 구체적 근거 없이 “이를 선동한 이들 중 많은 수가 외국인”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서 하버드에 반유대주의 근절 등을 명분으로 정책 변경을 요구했지만, 하버드는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약 26억5000만달러에 달하는 연방 지원금을 중단했었다. 이번에는 유학생 유치 자격까지 박탈하며 하버드에 보복 조치를 가한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특히 재학생의 27%를 차지하는 6793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에 대해서도 “학교를 옮기지 않으면 체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복 조치로 인해 하버드에서 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갑자기 학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 몰리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엔 432명(5%)에 달하는 한국인 학생도 포함돼 있다.
놈 장관은 특히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컬럼비아대 등 다른 대학에도 유사한 조치를 고려하느냐’는 질문에 “절대적으로 그렇다”며 “이날 조치는 다른 모든 대학에 행동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하는 경고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컬럼비아대에선 지난 3월 한국계 1.5세인 정모씨가 학내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영주권이 취소돼 추방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날 보건복지부 산하 민권국은 컬럼비아대가 이스라엘계 재학생에 대한 괴롭힘 행위를 방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계 학생에 대한 괴롭힘을 방치한 것은 ‘인종, 피부색, 국적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미국의 민권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학 측에 민권법 위반 통보서를 보냈다고 한다.
지난해 미국의 대학가에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중단 등을 촉구하는 반전 시위가 확산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상대적으로 학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느슨하게 대응했던 조 바이든 행정부와 달리 대학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제도 개편을 요구했다.
타깃이 된 곳은 하버드를 포함한 주요 명문대들로, 반유대주의뿐 아니라 대학의 입학·채용 관련 ‘DEI(다양성·포용성·형평성) 정책’이나 진보적 교칙 등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미국 사회에선 “향후 여론 주도층이 나오게 될 가능성이 큰 엘리트 대학들을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미리 손보려 한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반유대주의 근절안 등이 포함된 요구에 대해 앨런 가버 하버드대 총장은 “정부의 요구안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수용을 거부했다. 가버 총장은 유대인이다.
대학의 주수입원은 등록금이다. 트럼프 정부가 하버드에 대한 연방 지원금 중단에 이어 재학생의 27%를 차지하는 유학생을 받지 못하게 한 것은 하버드의 ‘돈줄’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놈 장관은 이날 “대학들이 외국인 학생을 등록시키고 그들의 높은 등록금으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학기금을 불리는 혜택을 누리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라며 “하버드가 SEVP 인증을 회복하고 싶으면 72시간 내에 외국인 학생 정보를 제공하라”고 압박했다.
하버드는 이미 연방 지원금 중단 이후 법적 소송과 함께 일부 연구 프로그램과 신규 채용을 중단하는 등 재정난을 돌파하기 위한 강도 높은 비용 절감에 돌입한 상태다.
하버드는 이날 조치에 대해서도 성명을 통해 “이런 보복 조치는 하버드 공동체와 미국에 심각한 해를 끼칠 위험이 있고, 하버드의 학술 및 연구 사명을 훼손한다”며 “하버드대와 미국을 풍요롭게 하는 140여개국에서 온 외국인 학생과 학자들을 수용할 능력을 유지하는 데 전적으로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법원이 이날 본안 소송이 종료될 때까지 트럼프 행정부가 유학생의 체류 자격 정보를 임의로 말소하고 비자를 박탈하지 못하도록 일단 제동을 걸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민주당 우세 지역인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은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유학생 및 교환학생 정보시스템(SEVIS)’에 등록된 20여명의 기록을 말소한 데 대해 “권한을 넘어선 자의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관련 소송이 끝날 때까지 유학생 신분 박탈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통상 SEVIS의 학생 정보 말소 관리는 해당 대학이 담당했지만, 트럼프의 ICE는 임의로 수천 명의 유학생 정보를 말소하면서 문제가 됐다. 현재 미 전역에서 최소 200명 이상의 유학생이 법원에서 가처분을 받았다.
법원이 이날 ICE의 SEVIS 기록 말소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전국적인 말소 금지 명령을 내리면서 일단 관련 재판이 끝날 때까지 연방정부는 유학생을 체포·구금하거나 비자를 박탈할 수 없게 됐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