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년에 한번씩 주어지는 휴가 시간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 목적지는 늘 한국행이었다. 부모님도 계시고 익숙한 고국 여행은 언제 가더라도 편안하고 설레인다.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동분서주 바빴다. 성향도, 나잇대도 서로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며 나의 젊은 아줌마 시절은 많은 시간이 육아와 라이드에 투자되었다. 혼자서 한국으로 날아가 부모님 품에 안길 때면, 부르짖던 말이 “나 좀 쉴래, 아무것도 안해도 돼”였다. 그저 조용히 있는 온전한 ‘쉼’이 나의 고국 방문 힐링 타임이었다. 그랬던 내가 올 해부터는 좀 달라졌다.
큰 아이 둘이 독립하고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니, 평화로운 여유 시간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나도 이제 자유다”를 외치며 편안함에 흠뻑 빠졌지만, 이내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이런 시간들이 점차 많아질테고 막내까지 대학에 가면 우리집은 그야말로 ‘빈 둥지’가 된다.
나는 어떤 노년을 보내게 될까? 어떻게 시간을 써야하지? 먼 훗날이라고 여겼던 이런 고민들이 빠르게 현실로 다가왔다. 아이들과 함께 북적이던 집안에 익숙해 있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도 어색하고, 남편과 둘만의 시간이 많아진 것도 아직은 낯설었다. 더 이상 나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가족들의 모습들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사실이었다. 주부로서의 나의 역할은 이제 많은 부분 상쇄되어 가고 있었다. 로봇 청소기와 식기 세척기가 살림을 도와주고, 아이는 밖에서 친구들과 식사하며 스스로 다녔고, 남편은 일로 바쁘고 회식도 잦았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내 삶의 새로운 챕터를 위한 세팅이 필요하겠다는 고민이 들었다.
이번 한국 방문 동안, 그 동안 못해왔던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 지난 25년간 모두들 서로 바빠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과 약속해 만났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만에 만나는 오랜 친구들이었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나의 느닷없는 연락에도 반갑게 품어주고, 변함없는 옛 모습과 말투 그대로 나를 대해주었다. 그 많은 시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의 나를 기억해 주었고, 마치 우리가 지금 학교 교정에 앉아 쉬는 시간에 얘기 나누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편하게 까불거리며 수다를 이어갔다. 그들은 잊고 살았던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되새겨 주었고, 앞으로 풍족해진 시간에 자주 연락할 수 있음에 흥분했다.
친구들과 나는 이제 함께 50대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30대와 40대, 가장 치열한 삶의 중심을 거쳐왔다. 직장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노력했고, 집안에서는 남편과 아이들을 뒷받침하려 애써왔다. 우리들은 그저 일상에 쫓겨 마음 속으로만 서로를 간직하며 표면적으로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연차가 쌓여 직장에서 인정받고, 아이들도 다 성장 시켰으며, 집안도 안정이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보고 추억을 들추어 볼 시간이 생긴 것이다. 하루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또 하루는 고등학생, 중학생으로 돌아갔다. 만나는 친구들에 따라 과거로의 시간을 넘나 들었다.
훌쩍 지나간 시간이 야속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꿈 많았던 어릴적 모습을 들여다보고 마주했다. 그 시절에 나보다 나를 잘 알던 친구들은, 해외에서 아들 셋 키우느라 애썼을 나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토닥여 주었으며 고민도 귀담아 들어주었다. 예전 말투나 행동들을 여전히 간직한 채 시간을 헤쳐온 친구들과 나는 여전히 잘 맞았다. 척하면 척 알아듣고, 비슷한 유머 코드에 연신 웃다보니 주름살이 더 늘어난거 같았다. 우리는 유난히 바삐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그간 연락이 없었어도 엊그제 보고 주말 지나 학교 나와 만나는것처럼, 이토록 반갑고 설레일 수 있을까? 좋은 친구들과의 소중한 만남은 인생을 잘 살아오고 있다는 중간 평가서 같았다. 나는 ‘옛 친구’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고, 위축됐던 가슴을 활짝 펴고 돌아왔다. 희망, 용기,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종합 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었다. 이제 더 단단해진 내가 새로운 삶이 내게 주는 다음 선물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