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국 내 노트북 농장 통해 미국 직장에 ‘원격 취업’
“고객들이 난리야. 아침 차려 먹을 시간도 없어요”
‘컴퓨터 업계’에서 일한다는 50세 미국 여성 크리스티나 채프먼이 2023년 6월, 팔로워 10만 명의 소셜미디어 틱톡 계정에 올린 동영상에서 이렇게 푸념한다.
수많은 고객의 성화에 제대로 된 식사조차 어렵다는 자랑 아닌 자랑이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서 그가 슬쩍 비추는 아침 메뉴 ‘아사이볼’ 뒤로 선반 위에 쌓인 노트북 10여대가 눈에 띈다. 이 노트북 대다수는 채프먼의 소유가 아니었다.
소셜미디어의 ‘재택근무 사업가’ 채프먼은 사실 북한 해커를 고객으로 둔 ‘노트북 농장’ 운영자였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7일 기소·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채프먼의 사례를 중심으로 북한의 새로운 외화벌이 수단으로 떠오른 노트북 농장의 실태를 집중 조명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신분으로 위장해 원격근무 형태의 정보기술(IT) 기업에 취업한 북한인 적발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북한 노동자들이 원격으로 미국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 채프먼이 운영한 것과 같은 노트북 농장이다.
노트북 농장은 미국 현지에서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 컴퓨터 여러 대를 동시에 운영하는 형태다.
해킹 등으로 미국인의 신원을 탈취한 북한 해커들은 북한 내부나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원격으로 노트북 농장에 연결해 매일 아침 시간에 맞춰 미국 내 직장에 원격 출근한다.
미국의 회사에서 보기에는 미국인 직원이 미국 내에서 업무하는 것과 외양이 같다.
채프먼과 같은 노트북 농장 운영자들은 북한 노동자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직장에 등록할 미국 현지의 주소를 제공해주고, 노트북 배송을 받아 원격 연결 프로그램을 설치하거나, 인터넷 연결을 원활하게 유지하는 관리자 역할을 맡는다.
채프먼이 원래부터 이런 일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웨이트리스, 마사지사 등으로 일했다. 이 시기 틱톡에선 생활고로 지낼 곳이 없다며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다 웹 개발자 직종에 취업하려고 기초 코딩 교육을 받은 사실을 채용 관련 소셜미디어 링크드인에 올린 것이 채프먼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가 됐다.
2020년 3월 북한 측에서 “해외 IT 근로자를 채용하는 회사를 위해 미국의 얼굴이 돼 달라”며 연락을 해온 것이다.
채프먼이 ‘북한’이라는 고객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요구를 받아들인 후 사업은 번창했다.
채프먼은 세금 관련 처리나 신분 증빙 서류 발송 등 고객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했다. 상시 인터넷 연결을 유지하고,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해결했다.
때때로 급여 수표가 농장 주소로 배송되면, 직접 사인해서 수수료를 떼고 다른 계좌로 입금해주기도 했다.
마침내 2023년 1월에는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마당 딸린 방 4개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심지어 고객도 채프먼의 서비스에 만족했는지 버지니아의 다른 노트북 농장에서 채프먼의 농장으로 노트북 수십 대를 옮기기도 했다.
북한 해커들은 이런 농장에서 상당한 수익을 거뒀다. 연방수사국(FBI) 관계자는 WSJ에 북한이 이런 형태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수억 달러(수천억원)에 이른다고 했다. 북한의 경제 규모를 고려했을 때 작지 않은 규모다.
특히 북한 해커들이 한국의 ‘억대 연봉’ 정도에 비견되는 ‘연봉 10만 달러’ 수준의 직장을 유지할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고도 FBI는 분석했다.
특히 노트북 농장의 일부 컴퓨터에는 바이러스 백신·방화벽을 우회하는 자체 제작 소프트웨어가 대거 설치돼 있었다. 이런 컴퓨터에서 해커들이 직장의 중요 데이터를 탈취했을 것으로 의심하는 시각이 많다.
채프먼의 농장은 결국 꼬리가 밟혔다.
2023년 10월 27일 FBI 수사관들이 결국 현장에 들이닥쳤다. 당시 농장엔 북한 해커들의 노트북 90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채프먼은 지난 2월 재판에서 금융사기, 신원 도용, 자금세탁 등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미국 연방검찰은 농장 운영으로 채프먼이 벌어들인 돈이 17만7천 달러(약 2억4천만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수익이 끊긴 채프먼은 2024년 8월 애리조나 피닉스의 노숙자 쉼터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도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채프먼 측 변호사는 밝혔다.
채프먼의 선고공판은 7월 16일 열린다. 최대 9년 형이 가능하다고 WSJ는 전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