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쌀쌀한 겨울 저녁, 9시가 조금 지나자 무슨 일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벤저민 카터 헷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의 서두는 소설스럽다.
1933년 2월 27일 바이마르공화국 국회의사당에 불이 났다. 헤르만 괴링 무임소장관, 아돌프 히틀러 총리, 프란츠 폰 파펜 부총리, 선전 전문가 요제프 괴벨스, 비밀경찰 총수 루돌프 딜스가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타오르는 불빛이 히틀러의 얼굴을 조명처럼 비춘다. 지은이는 그날을 ‘바이마르공화국 마지막 밤, 독일 민주주의 마지막 밤’이라고 썼다. 히틀러 내각은 화재 다음날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이른바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을 의결했다. 화재가 공산주의자 폭동의 전조라는 히틀러의 주장에 따라 헌법이 보장한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정지됐다. 정치적으로 위협이 된다면 누구든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게 됐다.
히틀러 집권에는 권력에 눈이 먼 기성 정치인들이 한몫 했다. 이들은 히틀러를 벼락출세한 정치 뜨내기이자 잠시 쓰고 버리기 좋은 말로 여겼지만 엄청난 오산이었다. 히틀러는 훨씬 야심만만한 인물이었고 한번 기회를 잡자 경쟁상대들을 모조리 제거하여 단숨에 권력을 장악했다. 명문 엘리트 출신으로서 꽃길만 걸어온 기성 정치인들은 행동력과 추진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히틀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들에게 히틀러는 그동안의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성 정치인들의 탐욕과 구태의연한 정쟁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던 독일 국민들 역시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은 히틀러에게 가스라이팅되어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나중에 보니 죄다 거짓말에 사기였지만 말이다. 결국 어설픈 민주주의가 괴물을 탄생시킨 셈이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의 집권을 막기 위해 애쓰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마지못해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그에게 권력을 향해 질주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줬다. 히틀러의 첫 내각은 나치당과 여러 보수정당들의 연립내각으로, 12명의 각료 가운데 나치 당원은 3명밖에 되지 않아 보수 정치인들이 히틀러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히틀러는 신속하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축출됐고, 3월 5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43.9%의 지지를 얻어 원내 제1당이 되었다. 1933년 7월 무렵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를 장악하여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킴으로써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겸한 총통에 올랐다. 이어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켜 독재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때부터 히틀러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관직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을 강제로 쫓아냈으며, 군사조직을 자신의 친위대 형식으로 재편하면서 방해가 되거나 반항의 기미를 보이는 무리들을 즉결처분했다. 나치 체제에서는 형법도 국가가 시민을 지키기 위한 사법적 수단이 아니었다. 민족공동체의 순수성과 정권이 가진 불가침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범죄자들을 숙청하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이 책은 독재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다 보면 국가권력이 일반적인 도덕과 법 기준을 전부 위반해도 이를 막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집권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는 민주주의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히틀러 정권을 탄생시킨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배고픔이었다. 또 증오심과 악마성을 부추기는 집단최면적인 선전선동이 국가권력과 결탁할 경우 인간 본성이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실증 체험 사례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시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치는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내 차례였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아홉 번째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다. 이번 대선은 예사 선거가 아니다. 5년 10년 후 뒤돌아보면, 아니 1년 2년 겪어보면,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지 모를 선거다. 선거는 국민이 행사하는 가장 숭고한 권리이며 동시에 가장 무거운 책임이다.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대한민국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오는 6월 3일은 최고·최적 후보를 뽑는 날이 아니다. 그런 욕심을 부릴만한 밥상이 아니다. 가장 위험한 후보, ‘해야 할 일’을 뒷전에 밀쳐놓고 ‘하고 싶은 일’에 골몰해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인물을 가려내기만 해도 성공이다. 원래 권력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옳은 방향으로 쓰면 선한 힘이고, 나쁜 방향으로 휘두르면 악한 권력이 된다. 그러나 견제할 방법이 없는 절대 권력은 다르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그 끝이 비참하고, 나라를 위기로 내몬다. 미국 의사당에 있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 동상 받침대 오른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남북전쟁 때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내려 주시고, 워터게이트 혼란 중엔 제럴드 포드를 보내주셨습니다. 꼭 필요한 때, 딱 맞는 인물을 골라 나라를 다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박근혜 탄핵 땐 문재인을 보내시고 윤석열 탄핵 땐 이재명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