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잖아요.” 전화를 끊고 보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두 시간이 넘는 통화였다.
그녀는 오늘 속상한 일이 있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쉽게 납득되지 않는 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늦은 밤, 가까운 사이도 아닌 내게 전화를 걸 정도였다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나는 조언도, 위로도 하지 않고 그저 들었다. 간간이 “아, 그러셨군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정도의 짧은 호응만 했을 뿐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 였던 것이다.
하지만 통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반복되는 말을 들으며 전화를 끊을 핑계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느꼈다. 솔직히 말을 끊는 게 맞는지, 아니면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적당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복잡해질 무렵 “늦게까지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에 문득 미안해졌다. 나는 과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며 끝까지 들어준 걸까. 그날 나는 ‘잠들지 않는 귀’가 되지 못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말할 타이밍을 잡기도, 상대의 말에 집중해서 귀 기울이기도 쉽지 않다. 나는 생각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여유가 필요하다. 특히 깊은 대화를 나눌 때는 말을 듣고, 정리해야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생각할 틈이 허락되지 않다 보니,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가 점점 버겁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조용히 귀를 열고 주고받는 대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모임이 끝난 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운 날이 있다. 특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앞세워 설명하듯, 가르치듯 말이 많았던 날이면 더욱 그렇다. 나도 모르게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리고,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는 자책이 따라온다. 말이 많아지는 건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내 귀는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쏟아내듯 마음껏 떠들고 온 날에도 마음이 개운치 않을 때가 있다. 혹시 말 실수를 하진 않았을까,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한 건 아닐까. 나를 되짚어보게 된다.
‘지갑과 귀는 열고 입은 닫아라.’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켜야 할 일이라고 한다. 곱씹게 되는 말이다. 정작 내게도 필요한 말이라는 걸 자주 잊는다. 특히 여럿이 모이면 더욱 쉽지가 않다. 어느 시점에 말을 하고, 언제 들어야 할지 경계는 갈수록 어렵다. 여럿이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셋, 둘로 나뉘기도 한다. 한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쪽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럴 때면 집중하지 못하고 영혼 없는 리액션만 남는다. 잘 듣는다는 건 단지 침묵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향해 내 마음을 여는 일이라는 걸 자주 잊는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 꽃이 한창일 때 누군가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못 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리를 비우면 자기가 가십거리가 될까 봐 무섭다는 것이었다. 모두 웃었지만, 웃음 속에 묻힌 이 말은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친밀감을 가장해 누군가의 뒷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당장은 가벼운 유쾌함처럼 보이지만, 쉽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많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잦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화난 사람으로 오해 받기도, 새침하고 도도한 사람으로 비춰 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말하고, 잘 들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지혜가 필요한 일임을 새삼 느낀다.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진짜 위로는 잘 듣는 귀에서 오는 것 아닐까. 말없이 마음을 품어주는 귀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덜 외로워질 것이다. 깨어 있는 귀 하나가 누군가에게 큰 숨구멍이 된다면, 오늘 내가 그 귀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