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수상함인가. 흘러간 옛노래를 듣는다. 4인조 혼성그룹 보니엠이 부른 ‘바빌론 강가에서’ 는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흑인 특유의 혼이 들어간 소울( soul)음악이다. 감정적인 표현과 메시지 전달에 무게를 둔 음악이기에 그 음색도 흐느끼듯 격정적이고 울림이 있다. 예전에는 이 노래를 그저 흥겨운 팝송 정도로만 알고 흥얼거렸지만 가수들의 신나는 춤과 아름다운 화음이 서러움의 승화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가슴으로 듣게 되었다.
노래는 바빌론에 끌려가서 망국의 슬픔 속에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의 애환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참담한 심경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에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여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편 137::1-4)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와 주권를 잃고 이방인이 통치하는 바빌론 땅에서 얼마나 큰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을까. 노래 가사는 성경의 내용 그대로다.
“우리는 바빌론 강가에서/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우리는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사악한 자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가서/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지금 우리가 낯선 땅에서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오늘 밤 여기 당신의 눈에 열납되게 하소서/우리는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어요/우리는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우리도 망국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선조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희망가’를 불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희망가’는 역설이다. 제목은 ‘희망가’이지만, 노래는 우울하고 비탄적인 분위기이고, 가사 내용도 다분히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사회상을 반영하여 현실도피적 염세적인 색채가 짙다. 이 노래는 삶에 희망을 묻지만, 그것은 환희와 기쁨이 아니라 체념과 허무와 망각이다. 3·1운동의 실패로 조국 독립의 꿈이 좌절된 우리 국민의 절망과 허탈한 심정의 표현이었으리라. 어쩌면 그 체념과 비움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한시도 ‘풍진 세상’이 아닌 적이 없었다. 식민지, 분단, 전쟁, 게다가 정신 없이 돌아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정치경제적 변화까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다이내믹 코리아’이니 어찌 ‘풍진’ 즉, 바람과 먼지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풍진 세상에서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첫 구절은 늘 절실한 질문이다. 뒤를 잇는 구절은 더 기막히다.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다. 사실 우리는 잘 먹고 잘살자고 악다구니를 쓰고 풍진 세상 한복판에서 헉헉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리는 지위에 오르면 희망이 족하겠니?’라고 진지하게 되묻는다. 조용한 달밤에 마음을 비우고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은 정말 일장춘몽 같은 것인데 말이다. 어쩌면 이 진지한 물음과 문제 제기가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리라.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이 노래를 부르면 노년에 진정으로 바라는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른다. 이렇게 낡고 늙은 유행가도 누구에게는 ‘희망’이다. ‘희망가’는 허무나 포기, 절망이 아니라 ‘위안’과 ‘힐링’이다. 삶에서 우러난 노래는 그 속에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담고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 다소 퇴폐적이면 어떻고, 궁상스러우면 어떠랴. 그 노래로 위로받고, 위로해줄 수 있다면. 문득 어느 시인의 해학적인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뿔싸! 이를 어쩌랴! 단 한 장뿐인 인생백지에 행복을 쓴다는 것이 그만 불행을 쓰고 말았네. 아하! 일체가 유심조라(一切 唯心造)! 이제는 추인처럼 ‘불행’ 앞에다가 ‘승’자 한 자 꾹 눌러 써넣고 껄 껄 껄 웃을 수밖에.“
이제 대한민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자연계에서 우연은 없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심은대로 거두리라’가 영구불변의 법칙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어느 길을 가거나 가지 않거나 그건 자유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 말을 좋아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에는 응당 책임이 뒤따른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그가 받아 든 것은 항로를 잃고 있는 나라, 분열된 사회, 진흙탕 정치문화, 하향곡선을 그리는 경제이다. 한미관계도 심상치 않다. 그는 과연 대한민국호를 잘 끌고 갈 것인가? 국민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통합’의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대통령은 남다른 역경 속에서 모진 삶을 이겨내 온 분이다. 그가 살아온 길에 대해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부정적 시각을 가진 국민들도 많다. 그들의 시각을 바꾸게 되는 지도자가 되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