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1)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은, 아무리 눌려 지내는 약하고 순한 사람이라도 너무 업신여기면 가만있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하찮아 보이는 생물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가르침에 앞서 이 말에는 힘없고 약하고 하찮은 존재가 지렁이라는 관점이 담겼다.
도서관에서 자연과학책 코너가 아니라, 동화책 코너에서 찾은 그림책
‘착한 지렁이는 모두 머리, 몸통, 꼬리로 되어 있습니다.’ ‘꼬리가 둘, 몸통이 하나, 머리가 없는 지렁이는 지루합니다.’ ‘지렁이들은 보통 걱정 없이 태평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지렁이로 사는 일도 만만치 않답니다.’ <지렁이 책>은 무슨 뜻인지 모를 이런 알쏭달쏭한 말들로 지렁이를 소개하고, 단순하고 귀여운 그림으로 지렁이가, 또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예쁘고 평안한지 보이도록 한다.
뚱보 지렁이, 귀머거리 지렁이, 수줍은 지렁이도 있고, 축구공이 심각한 골칫거리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애완 지렁이를 잡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러다 또 애완 지렁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며 지렁이를 위한 먹이, 편안한 잠자리, 적당한 운동, 지렁이 질병 (매듭 증상, 부스럼, 기생충, 우울증…)에 대해 설명한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지렁이, 시리아, 보르네오, 팜파스에 사는, 한마디로 세상에는 이런 지렁이 저런 지렁이가 많다는 것이다. 지렁이를 신성한 동물로 모시는 나라도 있고, 지렁이를 소시지처럼 먹는 나라도 있고, 인간이 문명을 일으키고, 전쟁을 하고, 새 땅을 발견할 때, 지렁이는 인간보다 먼저 살았고, 인간을 도왔고, 인간을 기다렸다는 지렁이의 역사도 소개한다.
읽을수록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긴가민가하다. <지렁이 책>이라면 당연히 있을 것 같은 내용들, 그러니까 지렁이는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머리 바로 뒤에 있는 환대로 머리와 꼬리를 구분하며, 환대 근처에 있는 생식기관에 서로 정자를 넣어주는 암수 구분이 없는 자웅동체이다. 이런 내용과 함께 지렁이가 인간에게 얼마나 유익한 동물인지 알려주고, 지렁이를 함부로 밟거나 괴롭히지 말고,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야 <지렁이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파삭파삭 깨버린다.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유머러스한 글과 그림으로 말이다.
밟으면 꿈틀하는 지렁이를 본 적 있는가? 사실 지렁이는 밟히면 죽는다. 그냥 손가락으로 살짝 대기만 해도 꿈틀 정도가 아니라, 몸이 꼬일 듯이 마구 비튼다. 늘 당하기만 하는 약하고 하찮은 존재로 보면, 그 강렬한 몸부림도 그저 작은 꿈틀로만 보이겠지만. 방어수단이 하나도 없고, 빠르게 움직일 수도 없고, 피부는 약하고, 독도 없어서 지렁이는 몸부림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지렁이는 먹이사슬에서도 최하위에 있어서 지렁이보다 크면 거의가 천적이란다. 개구리, 두꺼비 같은 양서류, 지네, 딱정벌레, 개미 같은 곤충, 육식을 하는 파충류, 조류, 지렁이탕을 보약으로 먹는 인간까지 모두 천적이다. 지렁이를 이용한 산업도 많다. 가축과 애완동물의 먹이, 유기농 비료 생산 등, 이런 산업에 이용되므로 지렁이 농장에 있는 지렁이는 소나 돼지처럼 가축으로 분류된다. 지렁이의 이로움과 유용성을 보노라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지렁이 같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을 지키고 아름답게 가꾸라는 신명(神命)을 받고 내려온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문명(civilization)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이며, 자연 그대로의 삶이나 원시적 생활방식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문명의 발달은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파괴와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멸종을 밑거름으로 하였다. 어차피 모든 생명의 역사는 멸종의 역사일 것이다. 인간은 정복이나 전쟁으로 인간 스스로도 파괴하는 존재니, 지렁이처럼 살 수 없다. 다만, 지렁이 책을 읽으면서 지구와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