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부터 남편은 켄터키에 사는 친구 걱정으로 휘청거린다. 대학시절 룸메이트로 만나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는 친구 데이비드가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을 들락거리고 이제는 보호시설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데이비드는 두살때 걸린 소아마비로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산다. 두 남자는 전화로 문자로 매일 연락하며 걱정과 감사로 범벅된 대화를 나눈다.
갈수록 악화되는 데이비드의 변화에 그가 보고 싶지만 찾아갈 엄두를 못 내는 남편을 보는 내 마음이 무겁다. 우리는 이제 삶의 고달픈 비탈길을 내려가는 나이여서 예전처럼 하고 싶은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환경이라 슬펐다. 그러다 막상 며칠 전 옛 친구의 소식을 받은 나도 남편처럼 휘청거린다.
반세기 훨씬 전의 일이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단짝이 된 수진이는 부산스런 나와 달리 얌전하다. 전공이 같은 그녀와 나의 책은 우리의 책이 됐고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세상의 모든 핑계를 만들어 싫은 강의는 회피했다.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꽃이 피거나 질적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의실보다 다방에서 괴테와 실러의 시를 음미하고 학교 근처 중국집, 빵집, 라면집이나 칼국수 집만 아니라 서울 중심가의 다방 섭렵도 함께 하며 청춘을 노래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학생활 4년을 세상과 좌충우돌하며 연애보다 꿈을 그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녀가 교사로 취직한 경기도 어느 도시의 고등학교를 찾아 갔었다. 학생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는 것이 천직이 아닌 것 같다며 그녀는 시작부터 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앞으로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자” 하고 헤어진 후 그녀와 연락이 두절됐었다.
그러다 우연히 미주 동문회를 통해서 그녀가 메릴랜드에 사는 것을 알게 됐다. 18년 전인가, 연락이 닿자 나는 남편과 딸들을 데리고 그녀가 사는 락빌로 찾아가서 그녀의 가족을 만났다. 그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직 그 흥분을 느낀다. 다 큰 아이들이 민망할 정도로 우리는 손 잡고 풀쩍풀쩍 뛰며 그동안 살아온 스토리를 빠르게 나누었다. 그녀는 여전히 멋진 여인으로 아들 둘을 잘 키웠고 같은 대학 선배인 그녀의 호탕한 남편은 한국말 못하는 내 남편에게 친절하게 메릴랜드의 이민사회를 소개해줬다.
내 딸들은 우리가 저희들 나이에 대학 캠퍼스를 누빈 이야기를 남의 나라 이야기로 신기해 했다. 지구 반대편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미국처럼 한국말을 못하는 내 딸들과 한국말을 잘 하는 그녀의 아들들이 그 다름을 지니고 머뭇거려서 조금 미안했었다. 그래도 우리 둘이서 시작한 인연이 불어난 가족들로 식당의 큰 테이블을 꽉 채운 것에 기분 좋았다. 그날 우리는 예전처럼 참으로 많이 웃었다. 그녀가 사는 곳을 떠나오면서 무척 아쉬웠고 “우리도 메릴랜드로 이사할까?” 할 정도로 나는 그녀 곁에 가슴 한쪽을 두고 왔었다.
그후 간혹,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가 우체국에 근무하는 시간이 달라서, 서로의 생활반경이 겹쳐지지 않았다. 그녀는 수다쟁이 나와 달리 여전히 말을, 문자를 아꼈다. 작년말에 같은 과 동기 철수를 만났을 적에 그녀에게 함께 옛날 옛적의 추억을 나누자고 연락했더니 그녀는 “나중에… 건강하게 잘 살아” 짧은 답을 줬다. 나는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이라 믿었고 사는 지역과 환경이 달라서 우리가 변했음을 인정했다. 그래도 그녀가 바쁘게 잘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그녀에게서 온 카톡 메시지가 있어서 반갑게 열었다가 기절할 뻔했다. 그녀 남편이 날벼락 같은 소식을 보냈다. 그녀가 깊은 병에 시달렸다가 지금 호스피스에 있고 곧 먼 길을 떠날 것 같다 해서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아내를 좋은 친구로 기억해 달라던 그는 목소리가 없었다. 난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추호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무정한 친구여서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숨긴 그녀는 끝까지 침묵했다. 그녀의 손을 한번 더 잡아보지 못하고 먼 길로 보내게 되니 가슴이 아프다. 사랑하는 친구가 세상 시름 내려놓고 편히 떠나길 기도하는데 독립기념일 불꽃에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