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15
베이질 브라운의 주름진 손이 움푹 들어간 구릉의 한지점에 머문다. 유적 발굴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확신에 찬 삽질을 계속한다. 경제적인 이익도, 명예도 얻지 못하는 그가 평생을 바쳐 유물을 파내며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 2차 세계 대전 무렵 영국 서퍽(Suffolk) 지역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과거를 현실로 끌어 올리는 발굴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상류층 부인 이디스는 자신의 땅에 있는 고분을 발굴하기 위해 베이질 브라운을 고용한다. 현대적 기술이 없던 시절, 발굴 작업은 극강의 육체적 노동을 요구했다. 끊임없는 고된 삽질과 흙더미에 깔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베이질은 마침내 영국이 놀랄만한 고대 앵글로 색슨족의 선박을 발견한다. 그 장대함에 감격한 이디스가 “우리가 고대인의 묘지 앞에 서 있군요” 했을 때 베이질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그들 삶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고대의 시간들을 끌어 올릴 때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이어지는 삶의 이음새를 보는 듯한 커다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사실 이디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대영 박물관의 고고학자들이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베이질을 발굴 현장에서 제외시키려 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를 옹호 해주던 이디스도 불치병 앞에서는 어린 아들 생각에 무너지고 있었다. 이디스의 아들 로버트는 섬세한 감성에 상상력이 풍부한 재치있는 소년이다. 발굴 현장에 수시로 드나들며 마치 아버지처럼 베이질을 따른다. 고대의 배를 무대로 우주의 별을 항해하는 꿈을 꾸는 로버트는 겉보기에는 철없어 보였지만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괴로워 하고 있는 속깊은 아이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울고 있는 로버트를 안아주는 베이질의 얼굴이 어둠에 묻혀갔다. 하지만 앵글로 색슨족의 용맹함이 전해지기라도 한듯 로보트는 엄마와의 이별을 끝이라는 슬픔대신 즐거운 선물로 준비하기로 한다. 어느날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배처럼 엄마와의 미래를 다른 차원에서 꿈꾸게 된 것이다.
별이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밤, 고분의 배안에는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모자가 있었다. 로버트는 엄마 품에 안겨 상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구를 떠날 여왕을 위해 축복의 선물을 가득 실은 고대의 배는 여왕을 기다리는 왕의 별을 향해 출발한다. 푸른 지구를 지나 우주로 날아가는 여왕은 지구의 아들을 걱정한다. 엄마를 그리워 하는 지구의 아들은 성장해서 우주 항해사가 된다. 아들이 첫 항해를 하는 날, 여왕 이디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아들의 이야기에 이디스의 얼굴은 따스한 눈물로 얼룩져 간다.
이디스의 죽음은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멀리서 로버트가 베이질에게 인사하는 장면과 응답하는 베이질의 손인사가 보여질 뿐이다. 베이질은 여왕의 배에 흙을 뿌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한다. 클로즈업 되는 그의 얼굴에는 담담함인지 슬픔인지 명확히 알수 없는 고요함이 서려있다. 그의 삽질이 이디스의 과거와 로버트의 미래가 한데 섞여 다시 드러날 그 침묵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위로처럼 가슴에 스며들었다. 자막이 올라가는 중에도 깊은 여운 속에 머물러 있었다. 순간, 문구 하나가 멍해 있던 눈길을 잡았다. 베이질의 이름은 당시 기록에서 빠졌다가 최근에서야 대영박물관 상시 전시관에 이디스와 함께 나란히 등재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이디스 역시 베이질의 시간을 드러내게 한 발굴자였던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별을 향해 떠나야 한다. 고대의 배를 타고 별의 세계로 항해를 떠나는 날, 깨어난 과거의 시간들은 미래를 이어주는 키가 되어 우리를 날아 오르게 할 것이다. 그 파묻힌 키를 찾아내는 베이질과 같은 이는 바로 우리 모두인 누구나이다. 로보트가 엄마의 시간을 기억하고 그 엄마의 시간으로 어른이 되어 가듯,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시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는 발굴자이기 때문이다. 그 발굴의 삽질에는 숙명을 감내하는 지단한 위로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에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마음이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