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한국 행 비행기를 타는 친구의 해맑은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서 떠나기 전에 통화를 했다. 한창 꿈을 키웠던 여대생시절, 훗날 우리들의 미래가 궁금할 적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읊었다. 그래서 그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 말이 따라온다. 북부 미시건주가 나 사는 남부에서 멀어도 그래도 같은 나라 안에 있으니 아직 그녀를 가까이 느낀다.
사실 대학 졸업 후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살았다가 2007년에 우연히 연결이 되어서 애틀랜타에서 만났었다. 미국 시민권자와 뉴질랜드 시민권자가 된 중년의 여인들로 마주 앉아서 우리가 변한 모습에 크게 놀랐었다. 아들 둘을 키운 그녀와 딸 둘을 키운 나, 그리고 미군에 복무했던 나와 심방전도사가 된, 철부지 시절 전혀 예기치 못한 반전이었다. 지역 상공회에 근무하던 나와 한인교회에 봉사하던 그녀, 우리는 젊은 시절에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만들어서 열심히 살고 있음에 기뻤다.
간혹 애틀랜타에 들리면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통해서 대학동기 E와 만나서 함께 향수를 달랬다. 서로 사는 생활은 달랐어도 우리에게는 캠퍼스를 누볐던 공통의 추억이 끈끈해서 푸근한 마음으로 과거로의 여행을 하면서 젊음을 되새기곤 했다. 그러다 E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 슬픈데 미시건주에 취업한 큰아들네와 함께 살겠다며 그녀가 애틀랜타 생활을 정리하고 남부를 떠나서 허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 치매 판정을 받은 소식에 가슴이 철렁해서 그녀의 현명한 결정을 이해했다.
그녀 부부는 이번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됐고 그녀의 손주는 내 손주보다 한달 먼저 태어났다. 동시에 할머니가 된 우리는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노후에 들어섰다. 갓난 아이를 돌보며 또한 아이로 변해가는 남편을 돌보던 그녀의 고충에 안스러웠지만 그녀는 변하는 남편의 좋은 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평소의 밝고 활기찬,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미시건주로 옮긴 지 8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아들네는 캘리포니아로 직장을 바꾸며 이사했고 그녀 부부는 노인아파트로 옮겼다. 이웃들과 성경공부 함께 하며 편안한 일상을 보내던 그들은 가끔 한국을 다녀왔다. 5개어를 하며 세상이 좁다고 활동하던 키가 훤칠한 그녀의 남편은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그림자가 되었다. 남편의 기억이 다 상실되기 전에 일가친척을 만나고 온 그녀로부터 한국에 사는 지인들 소식을 들었고 활동적인 그녀가 노인아파트에 정착하고 사는 것에 미흡하다는 느낌을 줬다.
드디어 그녀는 결정을 했다. 2월 어느 날, 추운 겨울 잘 지내느냐 묻던 나에게 마음을 풀었다. 편안한 일상에서 벗어나 남편을 돌보며 동시에 다른 외로운 노인들도 돕고 싶어서 여러 방법을 강구하고 조사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뉴질랜드에 남았던 둘째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돌보는 것을 돕고 봉사 사역을 같이하려 하니 든든하다. 목적지를 연고자 하나 없는 대구로 결정하며 내 생각을 많이 했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까마득한 기억 저 멀리 있는 내가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의 추억에 그녀를 옮겼다. 그녀의 옛모습을 떠올리니 삶을 보람차게 살려는 그녀의 야심 찬 계획에 봄기운이 실려 있었다.
한 가족이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귀국한다. 파란만장했던 이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남들은 태어난 나라의 국적만 유지하는데 그들은 한국과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적까지 두리 체험을 하며 삶의 한 가운데에서 살았으니 배우고 익힌 지혜가 많다. 18년 미국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달랑 가방만 들고 귀국하는 그녀는 무소유의 기쁨을 말했다. 그리고 비우면 채워 주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니 나머지 삶도 알차게 꾸며진다고 철썩 같이 믿는다. 강한 믿음이다.
오랫동안 내가 누구이며 또한 어디서 왔는지를 일깨워주던 친구가 영구 귀국하는 것에 조금 당황한다. 그녀가 지키는 죽을 때까지 남에게 봉사하는 삶은 나 자신의 편안을 유지하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앞으로 흥미롭고 신선한 노후를 보낼 그녀의 수고와 용기에 박수를 치며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읊는다. 우리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