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 냄새가 그리워. 여기와 다르거든.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더 그래. ‘우리’ 명절은 아니지만. 남편의 꿈을 좇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지. 그땐 몰랐어. 떠난 뒤엔 이방인이 된다는 걸.”
한인 2세 극작가 로이드 서(50)의 연극 ‘하트 셀러스’(The Heart Sellers)가 조지아주 리틀 파이브 포인츠에 위치한 호라이즌 극장에서 애틀랜타 초연됐다. 17일 언론 시사회에서 160여명 관객을 만난 이 연극은 눈물 섞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2023년 밀워키 극장 세계초연을 마친 뒤 전국 18곳 극장에서 상연되며 당해 최다 제작 연극 9위에 꼽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일 “쿼터(할당 숫자)로 존재하던 이민자들을 꼼꼼한 디테일을 통해 인간화(humanize)했다”고 평했다.
‘하트 셀러스’는 1973년 백인 주류의 중소도시에 사는 한국과 베트남 출신 23세 두 여성 제인(홍재하)과 루나가 처음 맞는 추수감사절을 그린 2인극이다. 미국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한 남편을 따라 이민 온 지 3개월을 갓 넘긴 이들은 휴일 응급실 당직을 서는 남편을 기다리며 동네 K마트에서 저녁 장을 보다 우연히 만난다. 같은 외로운 처지를 알아 본 루나가 제인을 아파트로 초대하고, 이들은 ‘의사 사모님’으로 살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털어놓게 된다. 한국계 미셀 포코팍 배우가 제인 역을 맡았다.
제인 역의 미셀 포코팍 배우(오른쪽)와 루나 역의 제닌 플로렌스 자신토
이 극을 쓴 로이드 서 작가는 한국 출신 아버지와 중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이민자 정체성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2018년작 ‘차이니즈 레이디’는 14살 나이로 미국 땅을 밟은 최초의 중국 여성이자 이국적 상품으로 하루 많게는 8시간 전시돼야 했던 실존 인물 ‘아퐁 모이’를 다룬다. 2012년 한국 대학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던 ‘아메리칸 환갑’은 텍사스 미국 회사에서 잘린 뒤 홀로 한국으로 돌아갔던 전민석이 환갑을 맞아 미국에 남겨둔 가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서 작가는 2023년 중국인 배척법을 다룬 ‘파 컨트리’(The Far Country)로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m not a crook)라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외침이 극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1973년은 이 연극 이름이 유래한 1965년 이민·국적법, 일명 ‘하트셀러법’이 발효된 지 8년이 지난 시점이다. 올해로 60년을 맞는 이 법은 미국 이민사의 가장 큰 변곡점 중 하나다. 국가별 쿼터제를 통해 유럽 이민자만 받던 미국은 1965년을 기점으로 유용한 기술을 가진 숙련노동자라면 아시아인에게도 이민 문호를 개방했다. 제인과 루나의 남편이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던 이유다. 가족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축출당한 공통의 기억을 가진 이들은 “아시아에서 의사로 일하며 버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받는다”고 미국 살이를 정당화하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향수에 시달린다.
극 이름 ‘하트셀러’는 아메리칸 드림을 둘러싼 이 딜레마를 조명한다. 루나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변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 입국을 대가로 출입국 심사관에게 심장을 내주고(sold my heart) 더이상 모국에 남은 어머니도, 이곳에서 키우게 될, 부유한 미국인으로 자라날 아이들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낯선 땅에서 겪는 불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두 여성은 집과 마트만 오가는 일상에서 함께 도망치자는 기약 없는 탈출을 모의하기도 한다.
이날 90분의 이야기가 끝나자 관객 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눈물을 훔쳤다. 아시아계 비영리 교육단체 AAVED의 신원희 대표는 “남편의 미국 석박사 유학길을 따라 온 많은 한인 여성들이 제한된 교통편과 언어장벽으로 친구 하나 없이 가정 내 고립되곤 했다”며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라고 했다.
호라이즌 극장에서 11월 9일까지 상연한다.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