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 추위가 지나자 완연한 봄이다. 모든 생명이 탄성을 지르듯 빠르게 세상에 모습을 들어낸다. 특히 온갖 나무들에 빠끔히 돋아나오는 여린 잎들이 제각기 다양한 색조로 신선하다. 운전하면서 양 도로변의 푸름에 취하니 조니 캐쉬가 부른 ‘40 색조의 초록’ 노래가 내 안에서 터져 나와 물오른 나뭇잎들과 어울린다. 1959년, 27세의 조니 캐쉬는 영국으로 공연하러 가던 길에 비행기 창 밖으로 본 초록의 섬, 아일랜드에 반했다. 그는 공연을 마치자 바로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푸름에 푹 취해서 이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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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어디 있니? 오늘 올 줄 알았는데 소식이 없어서…” “잠시 바람 쐬러 나왔어요” 어머님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을 넘어 노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곁에 있던 남편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님을 뵈러 갔다. 어머님은 쌓인 서운함과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셨다. 나는 선생님 앞에서 꾸중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나는 점심도 차려드리지 못한 채 그냥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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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는 애틀랜타 한인들에게 언제나 특별한 존재이다. 비행기표 없이도 떠날 수 있는, 그러나 분명히 ‘다른 세계’로 느껴지는 곳. 차 한 대에 가족을 태우고 몇 시간만 남쪽으로 달리면 야자수가 흔들리는 해안도로가 나타나고, 따뜻한 바닷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계절이 한 발 앞서가는 그 땅에서는 봄이 오지 않았어도 이미 여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쩌면 플로리다는 단순한 지리적 목적지가 아니라, 이민 생활의 팽팽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는 하나의 의식(儀式)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이 익숙해지기 전, 파나마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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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1월 눈발이 휘날리는 이탈리아 북부 산지 카노사성 앞에 한 젊은이가 사흘째 맨발로 서 있었다. 옷차림은 수도자처럼 얇고 검소했고 신발조차 신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던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권을 지키려고 교황에게 대항하며 결기를 보이던 젊은 권력자였다. 하지만 교황에게 파문당해 황제의 자리와 생명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결국 교황의 용서를 구하려고 치욕을 무릅쓰고 추위 속에 떨며 서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었다. 교황은 왕을 파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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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 환자에게 신발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다. 자칫하면 작은 상처가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신발은 발을 보호하는 ‘의료 장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러운 비용 때문에 적절한 신발 착용을 미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의 공공 의료보험인 메디케어 파트B(Medicare Part B)는 당뇨 환자의 발 건강을 위해 매년 당뇨 전용 신발과 인솔(깔창)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원 내용은 연 1회 기준으로 당뇨 전용 신발 1켤레와 맞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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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만 명이 몰려드는 대규모 코리안 페스티벌 현장을 누비다 보면, 한국 음식과 문화에 대한 타민족의 뜨거운 관심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제 한식은 더 이상 한인 사회만의 음식이 아니다. 세계인이 즐기고, 찾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문화 자산이 되었다. 필자는 2019년 9월, 애틀랜타에서 제1회 K-BBQ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놀라운 성과를 직접 목격했다. 이후 팬데믹으로 그 흐름이 일시 주춤했으나, 지금 다시 애틀랜타 코리안 페스티벌로 확대 지속되면서 매년 1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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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3주 동안 혼자 한국에 갔다. 장모님 연세가 많아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몰라 다녀오겠다고 했다. 긴 비행 시간과 시차가 힘들어 나는 더 이상 한국에 가지 않기로 했기에, 아내 혼자 떠났다. 아내 없이 혼자 집에 있으니 물론 불편 하지만 몇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혼자 있으니 무엇보다 식사는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식사는 평소에도 내가 내 먹을 것을 준비하는 편이어서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막상 지내보니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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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23 삼면이 강으로 둘러 쌓인 영월땅 청령포에 새로운 유배자가 온다. 수염이 허연 정승 대가가 오리라고 기대했던 촌장 엄흥도는 솜털이 남아 있는 아이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다. 윗마을 촌장은 귀향이 풀려 한양으로 간 영의정 덕에 마을이 배곯는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왕위에서 쫒겨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새파란 아이라니, 엄흥도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하다. 어린 왕은 죽을 생각만 한다. 그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엄흥도의 인내는 한계에 달한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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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없는 무덤 앞 낡은 돌비석 모서리 닳아있다 부서지고 깎인 흔적 위로 푸른 이끼가 낮은 음을 켠다 악보 밖의 음처럼 누군가의 타다 남은 긴 여정이 잿빛 그림자처럼 내려앉은 자리 흙 속의 뼈마디처럼 햇살보다 먼저 눈길에 닿고 싶었던 이름 잃은 것들의 손짓 침묵을 위한 하루의 깜박임이 끝없이 퇴적된 기억 흘리며 아무도 듣지 않는 깊은 곳에서 피었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피어나는 숨결 맞닿으며 말 없는 잔빛이 하루의 서정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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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열 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 그 날, 나는 고향을 떠났지만 금강산만은 내 안에 남겨 두고 온 듯하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금강산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을 파고들 때면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멀리서 바람처럼 한 여인이 걸어온다. 세월을 초월한 맑고도 서늘한 눈빛. 조선의 명기 황진이, 그녀가 다시 내 곁에 선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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