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에 ‘할머니 캠프’를 운영한지 4년째다. 올해도 아이들이 사는 곳과 다른 앨라배마 특유의 환경을 소개하고 사는 지역이 달라 자주 못 보는 두 손주가 함께 뒹굴고 놀며 정을 쌓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두 딸의 성향이 다르듯이 그들이 키운 아이들도 다르다. 버지니아에서 큰딸이 자유로이 키운 8살 큰아이를 나는 ‘야생화’라 부르고, 조지아에서 둘째딸이 조심조심 감싸며 키운 5살 작은아이는 ‘온실화’ 라 부른다. 그렇게 다른 환경에서 크는 아이들은 성격이 다르고 먹는 음식과 노는 방식이 달라 뭐든 의견 투합이 잘 안돼서 자주 다퉜다. 아이들이 피운 요란한 소음에 평소 고요하던 집안이 흔들리면 나는 늘 큰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큰아이의 불만은 대단했고 시침 뚝 뗀 작은아이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곧바로 큰아이 곁에 와서 뭐든 똑 같이 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기를 거듭하는 장난꾸러기들을 데리고 앨라배마 명소를 찾아 다녔다. 바닷가를 찾았고, USS Alabama 전함과 잠수함을 둘러봤고, 해바라기 들판에 가서 활짝 핀 꽃들과 놀다가 대나무 숲이 무성한 공원에서 숨바꼭질했다. 그리고 올드 앨라배마 타운과 이웃 도시의 강을 끼고 형성된 산책로에서 전세기 흔적을 더듬고 실내 전시관이나 미술관을 순방했다. 몇 곳은 나와 손주들이 유일한 방문객이라 도착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앨라배마에 살지 않는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온 장소를 예약했으니 맘껏 뛰어도 돼” 했다. 그리고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한산한 장소에서 자유롭게 소리치고 놀았다.
아이들을 YMCA캠프에 보내고 나는 평소대로 운동했다. 활동적인 큰아이에게는 체스, 농구, 테니스 레슨을 보탰고 주립 연극장 ASF에서 운영하는 ‘캠프 세익스피어’ 에서 연극에 대한 전반적인 체험을 맛보게 했다. 외가를 방문했을 적에 연극을 보여줘서 연극장은 익숙하지만 이번에는 무대 뒤의 환경도 알게 했다. 캠프 마지막날, 아이들이 무대에 올린 ‘햄릿’ 공연은 톡톡 튀고 재미있었다. 400년 전에 죽은 세익스피어가 왜 중요한지 묻던 작은아이는 연극이 끝나자 무대로 뛰어가 큰아이를 껴안고 자랑스러워 했고 “To be, or not to be”는 아이들의 만트라가 됐다.
두 아이가 같은 취미를 가진 것이 하나 있다. 광적인 포켓몬 카드 수집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소장품을 가져와 보여주고 교환하기도 하며 포켓몬 캐릭터의 신비와 마술적인 초능력에 매료되어 있다. 작은아이는 포켓몬 캐릭터 소개서 2인치 두께의 두터운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서 한달쯤 되니 책이 너덜 해졌다. 낯선 이름을 익숙하게 부르며 깨알 같은 글씨로 프린트 된 정보를 읽는 아이들이 참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나는 낯설었다. 작은 미물에 누군가의 창조력이 상상의 날개를 달아줘서 변형된 포켓몬 캐릭터는 나와 아이들을 갈라놓았다. 다른 장난감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게임 가게에서 빈티지 카드를 찾는 아이들이 나에게서 멀어짐을 느꼈다.
생각이 달라도 잘 놀고 어딜가든 큰아이가 작은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모습 보며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서로 책을 읽어주다 가도 티격태격 다투던 작은아이가 집으로 돌아가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혼자된 큰아이는 얌전히 레고를 조작하고 할아버지와 체스판을 벌린다. 매일 선크림 잔뜩 발라도 아이의 노출된 피부 색갈이 짙게 반짝거리는 것을 내가 남부에서 영근 맛있는 과일이라고 좋아하니 큰 아이가 씩 웃었다. 그리고 자신은 “멍든 앨라배마 복숭아” 라 했다.
“멍든?” 물었더니 아이가 설명했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파머스 마켓에서 칠톤 카운티의 명산 복숭아를 잔뜩 사오고 올여름 아이들은 앨라배마 복숭아의 달콤함에 푹 빠졌다. 한번은 겉은 멀쩡한데 껍질을 벗기니 갈색으로 멍든 부위가 있어서 보여줬었다. 하얀 백도에 숨어 있던 옅은 브라운색을 봤던 아이는 그 색깔에 자신의 팔과 다리를 연상했다.
아이의 눈높이로 놀다가 지난 4월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자리 잡은 지역의 이웃 인심이 좋아 너무 행복하다며 남광우 교수의 수필집 ‘살맛이 있다’ 상기시켰다. 우리의 대학시절에 발간된 그 수필집을 나는 까맣게 잊었었다. 일상에 살맛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나의 환경을 둘러보는데 불쑥 다가와 나를 확 껴안는 멍든 앨라배마 복숭아로 나도 행복하고 분명 살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