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출신 작가 후세인 할락은 최근 미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권위주의 나라에 살고 있다.” 권위주의 국가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이 그렇게 돼 간다고 꼬집었다.
미국인들은 권위주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미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권위주의 권력은 스스로 알리지 않는다. 목소리를 빼앗고, 선택 폭을 좁히고, 자유는 단지 기억으로만 남는다.
전형적인 수법은 언제나 헛된 선거로 시작한다. 충성도 높은 일부 유권자들의 거친 지지로 권력을 얻은 뒤 시민사회 억압, 관료 공작으로 반대 목소리를 숨죽이게 한다. 야당은 권력을 돕는 같은 후원자들에게 자금을 받고, 용감한 내부인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형식적 분노로 ‘야당’인 척한다. 그동안 권력은 닫혀진 방 안에서 힘을 모은다. 권위주의를 경험한 이들에게 익숙한 전개다.
이민단속국(ICE)이라는 사설 군대는 사면된 극우주의자들로 구성돼 있으며, AI가 선택한 이민자들을 놀라운 속도로 아무런 제재 없이 ‘사라지게’ 한다. 구금된 이들의 65%는 전과가 없고, 93%는 폭력 범죄와 무관하다. 많은 이들이 시민 또는 합법 거주자인데 미국에서 사라지는 ‘적법한 절차(due process)’ 없이 권리를 박탈한다. 한때 누렸던 권리는 ‘희미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시민권자이고 나는 안전해.” ICE는 당신을 잡으러 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최근 텍사스에 대홍수가 닥쳤다. 부패와 의도적 방치로 조기 경보는 작동하지 않았다. 135명이 익사했고, 37명은 어린이였다. 그리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정부는 당신의 세금으로 운영된다. 정부가 타인에게 잔혹할 때, 당신이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그 정부는 정작 가장 필요할 때 당신을 버린다. 정부의 충성은 시민이 아닌 권력으로 간다. 정권에 봉사하는 기업은 소비자 권리를 포기한다. 미국의 모든 것이 결국 민영 교도소 산업처럼 된다. 사람의 고통을 통해 대놓고 이익을 얻고, 아무런 감시 없이 번창한다. 당신을 지우는데 이제 탱크는 필요 없다. 정부 통제 인공지능이 단 한 번의 키 입력으로 해낸다. 이런 일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조각조각 해체한다.
특권에 눈 먼 시선은 경찰 폭력, 유권자 억압, 공공 서비스 붕괴를 ‘남의 일’로 간주한다. 권위주의는 “설마 나에게?”라고 믿을 때 우뚝 선다. 미국은 이미 위험할 정도로 권위주의에 가깝다. 언론은 기업 탐욕에 무릎 꿇고, 사법부는 약해졌다.
권위주의는 무력감, 무관심, 그리고 정상인 척하는 ‘환상’ 위에 세워진다. 편안, 오락, 가짜 예의를 따지며 안심시킨다.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이들은 가장 먼저 침묵 당한다. 신속하고 단결된 대응이 없으면, 민주주의의 꿈은 앞으로 수 세대 동안 사라질 수 있다.
권위주의는 끊임없는 대항으로만 무너진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침묵인가, 용기인가? 순응인가, 대항인가? 탄압이 당신에게 오지 않을 거라 믿는다면 틀렸다. 결국 모두에게 닿는다. 한 집단의 권리를 빼앗는 순간이 모든 자유의 종말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을 결정한다. 오늘 뒤 선택의 기회가 없을 수 있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 대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