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3월 1일, 김포공항에서 33살의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길에 나를 보러 온 친척분들에게 허리 굽혀 작별의 절을 하고 돌아서서 비행기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닥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올라가다가 친척들 속에 서 있을 아내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그냥 비행기 문으로 들어갔다.
유학을 가게 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석사학위를 하고 교육대학 연수원 전임강사를 하다 보니 박사학위가 없으면 교수 자리를 잡기가 어려운 시절로 변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온 분들 중에는 식당에서 접시 닦기를 해서 학비를 벌었다는 분도 있었다. 고생할 각오만 있으면 유학에 도전해 보라는 교수님도 있었다. 돈이나 배경은 없었어도 나에겐 고생이라면 경험이 있었다. 6·25 난리 후 산골 아이가 서울로 와 낮에는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다.
연수원 전임강사 자리에 사표를 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한국에 남았다. 돈 몇백 달러를 준비했다. 접시를 닦든 마당의 풀을 깎든 돈을 벌며 공부하고 빠른 시일 내에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33살에 미국에 와서 55년이 지나 88살 노인이 되었다. 아내와 나는 55년 기념으로 조용한 식당에 가서 단둘이 그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보았다.
식당에서 아내에게 그동안 제일 힘들었던 일을 물어보았다. 내가 미국에 오고 1년 반 후 아내와 아들이 유학생 가족으로 미국에 왔지만, 혼자 한국에 있을 때 시동생 학교 보내는 일, 시댁 집터에 길을 내야 하는 도시계획에 따라 길 땅값을 내는 일, 어린 아들과 친정으로 가서 살며 서울 초등학교 교사로 출퇴근하는 일이 힘들었다고 했다.
아내가 미국에 살면서 즐겁고 감사한 일들 중에 두 아들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고, 특히, 큰아들이 의대에 합격했을 때를 말했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5년간 장교로 근무하다 사직하고 의대에 입학원서를 넣고, 입학에 안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근심할 때, LA에서 장거리 전화로 아들의 의대 입학 소식을 전했다. 우리 부부는 순간 안심되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내가 말한 또 한 가지 기뻤던 일은
나도 미국 생활 55년을 돌아보며 어려웠던 사건을 떠올려 보니, 학위를 마치자 첫 직장인 한 흑인 대학 강의실에서 작은 동양인 교수인 내가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하니 학생들이 “뭐라고(What)?” 하고 소리치던 모습, 칠판에 영어 글씨를 쓰는데 스펠링이 틀렸다며 소리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4학년 철자법 교재를 사다가 교수라는 내가 철자법을 연습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밤에는 수학을 배우는 학생이 되어 대학 강의실에 앉았던 내 자신을 돌아본다. 박사학위 받고 한국 대학에서 오라는 통지를 받았지만 미국 대학에 눌러앉자 새로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 10년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55년 미국 생활 속에서 즐겁고 보람된 장면을 기억 속에서 찾아보니 수없이 많이 떠오른다. 교사들 재교육 강사로 빈번히 초청받을 때, 대학에서 종신교수로 테뉴어를 받았을 때, 영어로 쓴 책이 출판되어 잘 팔릴 때, 우수 교수상을 받을 때, 70대 중반까지 일하고 자진 은퇴할 때, 지금까지 내 옆에서 그 어려웠던 시간들을 나와 같이 나눈 아내가 아직도 건강한 것, 잘 살아가는 두 아들들, 나도 늙어가며 없던 병들이 생기지만 비교적 건강한 것…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찾는 자가 찾고, 구하는 자가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린다.” 그 구절은 6·25 전쟁 후 내가 벽촌 산골에서 서울로 와 벽에 붓글씨로 써서 붙이고 매일 읽으며 낮에는 일거리를 찾아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던 시절 늘 마음에 새겼던 말이다.
미국 생활도 돌아보니 꼭 산꼴에서 서울 와 살 때처럼 열심히 살았다.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는 말이 어려 서의 서울 생활을 통해 내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어 미국에 와서도 나를 열심히 살게 한 원동력 같아 감사하다. 지금은 ‘범사에 감사’하려 노력한다. 노력한 만큼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