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문직 취업 비자(H-1B) 수수료 인상으로 연간 140억 달러(약 20조원)의 비용 폭탄을 맞게 될 거란 분석이 나왔다. 기업들은 과한 수수료는 위법이라며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는 분위기다.
21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앞으로 미국 고용주들이 숙련된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는 데 매년 140억 달러의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국(USCIS)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발급된 H-1B 비자는 14만1000건이다. 현재 추세가 유지된다면 매년 140억달러의 비용이 추가로 든다는 계산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H-1B 비자 수수료를 기존 1000달러(약 140만원)에서 100배인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로 올리는 포고문에 서명했다. 기업들이 반발하자 다음 날 백악관은 인상된 수수료가 신규 비자 신청자에게만 적용될 예정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이번 조치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건 IT 업계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해외 엔지니어, 과학자, 코딩 전문가 등을 채용하기 위해 H-1B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2023년 기준 H-1B 비자 소지자의 약 3분의 2가 IT 업계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 등 일부 기업들은 포고문이 발표된 즉시 해외 체류 중인 H-1B 직원들에게 미국으로 돌아오라는 권고를 내렸다.
FT는 “미국 주요 기업들의 변호사들은 주무 부처인 국무부의 추가 설명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H-1B 비자 수수료 인상에 위법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악관은 포고문에서 이번 조치가 ‘이민 및 국적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권한에 따라 시행된다고 밝혔다. 이는 대통령에게 외국인의 입국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글로벌 로펌인 허버트 스미스 프리힐스의 매튜 던 파트너 변호사는 “정부는 H-1B 비자 운영에 드는 비용을 수수료로 부과할 수 있는 것”이라며 “10만 달러는 정부 권한 밖의 금액”이라고 지적했다. 이민전문 로펌 비알토의 안젤로 파파렐리 파트너 변호사는 “의회 법안이 아닌 대통령의 포고문으로 법원의 심사를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의 다른 행정명령들도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상대국에 부과한 상호관세에 대해 미국 1, 2심 법원은 대통령의 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 밖에 유학생 추방, 연방준비제도(Fed) 이사 해임 등도 번번이 소송에 가로막혔다. FT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에 걸려 있는 소송은 135건에 달한다. 이번 비자 수수료 인상도 법원에서 대통령의 권한 범위를 놓고 다투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가 법적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비자 수수료 인상에 나선 배경엔 인도 견제 목적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도는 H-1B 비자 수혜자의 약 71%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포고문을 발표한 시점도 인도 무역협상 대표단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기 하루 전날 이뤄졌다.
H-1B 비자 수수료가 인상되면 미국에 엔지니어를 파견하는 인도의 IT 아웃소싱 업체들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로이터통신은 “2830억 달러(약 400조원) 규모의 인도 IT 산업은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로 수십 년 동안 유지해온 전략을 전면 개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장윤서 기자 chang.yoonseo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