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 놓은 쓰봉 속주머니에 십만원이 있다”/병원에 입원하자마자 무슨 큰 비밀이라도 일러 주듯이/엄마는 누나에게 말했다/속곳 깊숙이 감춰 놓은 빳빳한 엄마 재산 십만원/만원은 손주들 오면 주고 싶었고/만원은 누나 반찬값 없을 때 내놓고 싶었고/나머지는 약값 모자랄 때 쓰려 했던/엄마 전 재산 십만 원…“
권대웅 시인의 ‘쓰봉 속 십만 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에 초연할 수는 없다. 사내의 삶은 쉽지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기어코 돈을 벌어야하는 것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은 이미 가장이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돈은 육체적 심리적 자유를 보장한다. 돈은 궁핍과 고뇌를 면하게 하고 비천한 노역을 면해준다. 돈은 인격적 자유이다. 돈은 온갖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돈이 있어야 밥을 먹는다. 우리의 먹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 밥은 끼니때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께 먹는 것이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 내용은 심오하다. 밥에 비할진대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
젊을 땐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이 들어보면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착각이었는지 깨닫는다. 건강도, 관계도, 자존심도 돈이 없으면 지켜지지 않는다. 늙어서 돈이 없다는 건 단순히 가난한 게 아니라, 선택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경제적 무력감은 생각보다 훨씬 비참하다. 60세 이후의 돈은 욕심이 아니라 ‘존엄의 도구’다. 돈이 있으면 선택이 생기고, 돈이 없으면 감내가 늘어난다. 돈 있는 노년이 삶을 평온하게 산다. 나이 들면 돈이 더 필요하다. 돈 있어야 나이 들어서 하기 싫은 일 피하며 산다. 돈 없으면 친구도 못 만난다. 노년의 평화는 결국 충분한 돈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돈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 없다.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혀 온 돈. 그래서 돈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 돈은 선과 악, 찬미와 증오, 기쁨과 슬픔의 근원이다. 하지만 돈은 아무 죄가 없다. ”왜 돈이 모든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하는가?“ 에밀 졸라의 지적이다. 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문제이지 돈이 악한 게 아니다. 사람의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고, 상금을 주거나 벌금을 물리고, 생명을 구하거나 죽이는 건 돈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다.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돈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는‘ 돈은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자리잡아 많은 사람들이 돈을 혐오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혐오는 위선일 뿐이다. 돈은 인간의 욕망 추구에 필요한 자원이며, 행복의 중요한 촉매제이다. 돈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돈 없이 입만 나불거려서 인의예지이며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이룰 수 있을까? 아니다.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쩐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에게 돈은 무엇인가?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돈은 물질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돈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미디어다. 짐멜은 <돈의 철학>에서 돈을 추상적이고 보편타당한 매개 형식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 개인과 세계를 이어주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돈은 선(善)을 따라 움직인다. 돈은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다. 영원한 돈도 없고 그냥 소멸되는 돈도 없다. 돈은 살아서 나의 의지에 따라 몸과 영혼을 부유하게 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정의로운 돈은 사람을 살린다. 돈에는 영적 생명력과 힘이 있다. 정당하게 번 돈은 행복과 행운의 길을 열어주고, 좋은 일과 유익한 일에 사용하면 사람을 얻고, 요령과 악으로 번 돈은 악령이 붙어서 원한을 만들고, 악인에게도 돈이 갈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나는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양심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이 존경받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나 역시 존경받을 수 있다. 나는 무능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돈은 나의 무능력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바꿔놓지 않는가?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돈은 ‘전도(顚倒)시키는 권력’으로서 ”진실을 거짓으로, 종을 주인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어리석음을 오성(悟性)으로, 오성을 어리석음으로 전환시킨다“고 단언한다. 돈은 분명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악신이다.
이 세상에서 돈보다 중요한 것은 많지만, 돈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자유다. 돈이 충분치 않으면 돈을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지만, 돈이 많으면 일을 하건 안 하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자유, 여행할 자유, 좋은 환경에서 살 자유… 모두 돈이 주는 자유다. 돈은 힘이다. 한 인간의 진정한 자립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엄연한 현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돈이 좋다. 다만 지금 돈이 없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