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시나요 / 뒤척이는 잠자리엔 꿈인 듯 생시인 듯 / 묻노니 그대여 때로는 제 말씀도 적어보나요 / 이승에서 맺은 인연 믿어도 좋을까요…
황진이의 ‘월야사’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남녀간의 그리는 정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한다. 일부종사할 수 없는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기생이 되기는 하였으나 같잖은 한량들의 노류장화(路柳墻花)가 되기는 싫었다. 시와 음률을 아는 풍류남아만을 가려서 사귀었던 황진이가 편력했던 남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아마도 양곡 소세양 대감이었을 것이다. 시서를 좋아했던 황진이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며 글씨 또한 소설체의 대가로 알려진 소세양의 명성을 일찍부터 듣고 흠모하여 오다가 이조판서까지 지낸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개성을 찾았을 때에 만났으니 연령의 차이는 많았겠지만, 높은 정신세계에서 교감했던 그들이었기에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서리 속에 들국화 노랗구나./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사람은 취하여 한 없이 마신다.//차가운 물소리 거문고 소리/매화향기 피리와 어울리는데/오늘날 서로가 헤어진 후면 /그대 그리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이 시는 황진이가 한 달 동안 사랑을 나누다가 한양으로 돌아가는 소판서 대감을 멀리 배웅하면서 강가의 한 누각에서 마지막 잔을 나누며 읊은 시이다. ‘오늘날 서로가 헤어진 후면 그대 그리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라는 끝 구절이 기약 없는 이별의 아픔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떠난 대감은 다시 소식이 없어 ‘월야사’ 라는 시로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타냈지만 지체 높은 양반은 기생을 다시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을 애초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마음속에 자신만의 연인을 품고 산다. 내게 그 이름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황진이라고 말하겠다. 그것은 젊은 날의 연정이라기보다, 세월을 건너와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그리움에 가깝다. 황진이는 조선의 기생이었으나, 단순히 풍류를 아는 여인이 아니라 시대를 꿰뚫어 본 시인이었다. 그녀의 시조에는 단아한 기품과 도도한 자존이 함께 흐른다.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사랑에 매이지 않는 기개, 이별을 말하면서도 스스로를 낮추지 않는 당당함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로 시작되는 시조를 떠올리면 사랑은 기다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울며 매달리는 기다림이 아니다.보고 싶은 임을 위해 밤을 잘라 이불 아래 두겠다는 상상 속에는 능동적인 사랑, 주체적인 사랑이 담겨 있다. 사랑을 받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을 빚어내는 여인의 모습이다. 또 그녀의 사랑은 자유로웠다. 신분의 굴레 속에서도 정신만은 속박되지 않았다. 당대의 선비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대등하게 겨루던 모습은, 사랑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교감임을 보여준다.
나는 인생의 황혼을 겪고 있지만, 황진이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젊어진다. 그것은 그녀가 노래한 사랑이 단지 남녀간의 정분이 아니라, 삶을 향한 열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한 사람에게 향하지만, 결국은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이다. 황진이의 시는 내게 묻는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그렇게도 그리워 하는가?“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젊음도, 지나간 날들도,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도 모두 사랑이라고. 결국 황진이의 시와 사랑은 한 줄기 바람과 같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지나간 뒤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향기라는 것을, 그녀는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도 조용히 일러주고 있다.
황진이는 오래 전 사람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늘 현재형으로 내 마음속을 거닌다. 젊은날에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재치있는 시구가 좋았다. 남자들의 혼을 빼앗았다는 이야기에 공연히 질투도 나고, 괜히 한 번쯤은 마주 앉아보고 싶다는 허황된 꿈도 꾸었다. 이제 나는 늙었다. 거울 속 얼굴은 세월의 구름으로 가득하고, 걸음은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황진이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하는 상상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 보인다. 늙은이의 주책이라 말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만약 지금 내 앞에 그녀가 선다면, 조용히 자리를 권하고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르며, 그녀의 눈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묻고 싶다. “그대는 어찌 그리 자유로울 수 있었소?”
여성으로서 미모를 갖추고 태어났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했는가. 그녀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연기하듯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 속은 미칠 듯이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철저한 남성중심사회에서 태어난 그녀는 ‘말하는 꽃’처럼 애완(愛玩)의 존재가 되기를 강요당했다. 사내들을 눈멀게 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때로 황진이에게는 아주 불편했다. 어쩌면 그 육신이 뿜어내는 어지러움을 걷어내고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을 향해 갈증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주체적인 자유였다. 자유인 황진이는 숨 막히는 내면의 공기들을 껴안은 채 생의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다 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진이 속에는 황진이가 없다. 그것이 황진이의 비극이다. 세상의 눈이 매서웠던 시대에, 한 여인이 자신의 재능과 기개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안다. 젊을 때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먼저 보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당당함이 더 눈에 들어온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연모하는 사내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또 다른 인간을 존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