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하는 시니어 프로그램에서 탁구 시간에 탁구대를 설치하는 일을 돕다가, 목이 말라 보리차 한 잔을 마시려고 물통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이 커피와 보리차 포트 앞에 몇 명 줄을 서 있기에 나도 그 뒤에 섰다.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어요. ‘숲 속의 별장’ 참 잘 읽었어요.”
앞에 서 있던 부인이 뒤돌아보며 나에게 말했다. 가끔 낯 모르는 분들이 내가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인지 묻기도 하고, 내 글 내용에 관해 의견을 주시기도 한다. 이 부인도 그런 분 중 한 분 같았다. 나는 그 부인에게 내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부인이 읽었다는 내 글은 친구 닥터 Y의 숲속 별장을 다녀와서, 내가 아내에게 큰절을 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닥터 Y는 치매를 앓는 부인을 오랫동안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간병인을 집으로 불러 집에서 돌보고 계신다. 밤에는 손수 부인의 병 수발을 든다. 60년을 함께 살며 사랑하는 아내를 자신이 편하자고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며 끝까지 직접 돌보겠다는 분이다. 밤이면 기저귀를 갈아주고, 변비가 오면 배변을 도와드린다.
그분의 숲속 별장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김 교수, 집에 가거든 부인께 큰 절 하세요. 건강하게 살아서 남편이 병간호 안 해도 되게 살게 해 주신 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고맙다고 큰절 하세요.”
그날 집에 오니 아내가 식탁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닥터 Y의 말이 생각나서 나는 허리를 굽혀 큰절을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아내에게 닥터 Y가 했던 말을 설명했다. 그제야 아내는 웃었다.
“당신도 건강한 남편인 나한테 큰절해야죠. 내가 아프면 당신도 고생할 텐데요. 우리 모두 큰 병 안 들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 하나님께 감사해야 해요.” 속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아직도 보리차를 마시려고 기다리는데, 조금 전에 신문에서 내 글을 잘 읽고 있다고 했던 부인이 다시 뒤돌아서서 말했다.
“선생님 글 ‘숲 속의 별장’을 읽고, 제가 남편에게 큰절을 했어요.”
“와, 그러셨어요!”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랐다.
그 부인은 남편에게 남편이 건강해서 자신을 병자 돌보는 아내로 만들지 않아 고맙다고 절하는 대신에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도 나에게 큰절하세요. 내가 병들어 몇 년을 누워 있고 당신이 내 병수발을 든다고 생각해 봐요. 그게 지옥이지 뭐예요. 그런데 나는 이렇게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보살피고 있으니 나에게 감사하며 절하세요.”
그런데 그 부인은, 건강한 남편에게 ‘자기를 병수발하지 않게 해 주어서 고맙다’며 큰절을 했다고 한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만 찾아온다고 한다. 부부 사이에서도 배우자에게서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부족한 것만 표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부인이 남편에게 큰절을 했을 때, 남편은 어떤 마음으로 그 절을 받았을까? “고마워요, 당신. 나를 믿고 살아온 당신, 아이들 낳아 기르고, 말 다르고 낯선 이국 땅에 와서, 당신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이제 늙어서까지 옆에서 건강하게 살며, 나에게 병수발 시키지 않아 고맙다고 말하는 당신… 내가 매일 큰절을 해도 모자라지요. 고마워요. 감사해요. 나도 당신에게 큰절을 할게요.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서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같이 갑시다.”
그런 남편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 이제야 철드나 봐. 늦게나마 남편인 나에게 그런 고마움을 느끼니 다행이긴 한데, 진작 그렇게 했어 야지. 앞으로도 늘 나에게 고마워하며 절하고 살아야 해. 나의 소중함을 알아 가니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 미쳤어? 왜 안 하던 짓을 해. 개도 늙으면 도토리를 먹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어. 늙은이는 예전 방식대로 살아야지 새로운 걸 하면 탈이 나. 그냥 예전대로 살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반이 남은 술잔을 보며 ‘반잔밖에 안 남았다’고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반잔이 남았다’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부족한 점만 찾으려 들면 평생을 찾아도 끝이 없고, 고마운 것과 풍성한 것만 찾으려 하면 평생을 찾아도 다 찾지 못한다 한다. 어느 편이 더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