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7)
비 온 뒤 맑게 갠 아침, 숟가락들은 아직 서랍 속에서 잠을 자고 있고, 아침 햇살이 팬케이크 위의 달콤한 버터처럼 이불 위에 따뜻하게 녹아 든다. 새들의 노래와 힘찬 수탉 소리, 엄마 아빠가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와 베이컨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 그리고 “어서 일어나, 밥 먹어야지!”하며 나를 깨우는 소리!
토끼 슬리퍼를 신고 살랑살랑 춤추며 식탁 앞에 앉아 달콤한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를 먹고, 해님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풀 더미에서 동물들과 신나게 뛰어논다. 노을 빛이 하늘과 땅을 물들이고 멀리서 땡땡 저녁 종소리가 울리면 “저녁 먹을 시간이야, 어서 오렴!”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
그림책 < Like Butter on Pancakes>은 참 달콤하고 포근하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시골 아이의 평범한 하루를 잔잔한 시처럼 들려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하루의 빛깔을 눈으로 먹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 읽어 준다면, 눈을 감고 듣는 소리의 맛은 더 달콤하고 부드러울 듯하다. 이 책의 작가 조나단 런던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에 글을 쓰게 된 것도 자신의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읽어 줄 마뜩한 책이 없어서 직접 지어서 들려주기로 마음먹어서라고 하니, 나도 반드시 귀로 맛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고 인터넷을 이리저리 헤집어보았다.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거대한 인터넷망에는 하나의 동화책을 여러 나라말로 읽어주는 동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전문 연기자, 성우, 작가, 일반인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아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준다. 책 제목으로 찾은 동영상 중, 일본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남자를 클릭하여 이야기를 듣는다. 나긋나긋하게 책 읽는 소리를 따뜻한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가만가만 듣는다. 잠은 오지 않고 나의 어린 시절, 얼음물 녹여 밥물을 붓고 장작불 피워 아침밥을 짓던 엄마의 모습이 새벽빛처럼 떠오른다.
어릴 적 나는 가마솥에서 솔솔 올라오는 밥 냄새를 맡으며 부뚜막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아궁이 앞으로 꺼낸 숯불에 김이나 생선을 굽는 엄마 옆에서 나는 절굿공이로 마늘을 콩콩 찍고 있으면 뿌듯하게 기분이 좋았다.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고, 오늘은 무엇을 하며 놀까 궁리하고,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흙투성이가 되어 집에 들어와 엄마의 꾸지람을 들으며 저녁밥을 서둘러 먹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어린이 만화 영화를 보고, 들들들 돌아가는 엄마의 재봉틀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잠들던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 중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이른 아침, 부뚜막에 걸터앉아 엄마를 바라보던 일이다.
“어서 일어나, 밥 먹어야지!”하는 엄마의 목소리만큼 따뜻하고 든든한 소리가 없을 텐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 부뚜막에서 엄마를 바라보던 어린 시절은 금방 지나가고, 나이 들면서 늦잠 자는 버릇이 생겨 엄마의 밥 먹으라는 말에 짜증을 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내 아이들이 다 크고 나서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부모가 주는 안정과 보호가 없다면 햇살은 팬케이크 위의 달콤한 버터가 아니라 살갗을 태우는 위험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 생각은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처럼 번져 평화롭고 따뜻한 우리의 일상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 가 닿았다. 우리의 먹거리를 키우는 사람, 집을 짓는 사람, 길을 닦고 터널을 뚫는 사람, 쓰레기를 치워주는 사람, 안전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 미래를 위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 병을 치료하는 사람, 춥고 배고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한 아이의 온 세상을 지켜야 하는 부모에게도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 보내는 평화로운 하루의 의미가 참 크다.
2026년 새 달력을 건다. 열 두 장의 달력을 찬찬히 넘겨보며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