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에 책임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과연 나는 제대로 늙고 있는지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다. 주변에서 나잇값을 못하는 노인들을 가끔 보게 되면서 이런 모습이 나에게도 해당되지는 않을까 부담감으로 자리 잡으면서부터이다. 오래 전에 SNS에서 본 어느 분의 글이다. ‘철 안든 사람의 특징’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공감이 되는 바 커서 노트에 메모해두었던 것이다.
“철 안든 사람은 첫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사소한 일에도 격하게 반응하고, 상대에게 상처주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분노를 즉각적으로 표출하면서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합리화한다. 둘째, 책임을 회피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이 잘못돼도 ‘그건 내 탓이 아니야’라며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보다 ‘누가 잘못했는가’에만 집착한다. 셋째,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지 못한다. 철 안든 사람은 언제나 ‘나’ 중심이다. 대화 중에도 자기 얘기만 하고, 남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넷째, 변화와 조언을 거부한다. 나이만 먹은 사람일수록 ”내가 더 잘 알아“라는 고집이 생긴다. 새로운 방식이나 다른 의견을 들으면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한다. 다섯째, 인간관계를 소모적으로 만든다. 이들은 말 한마디로 관계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고려하지 않는다.”
혹시 이 가운데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없는지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강변이 쏟아져도 그런 말을 하는 마음속에 이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세상의 상식이 만만치 않게 도사리고 있다. 나이는 결코 숫자만이 아니다. ‘나잇값’은 나이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경우는 나잇값을 한다는 말은 잘 안 하고, 나잇값을 못 한다는 표현을 한다. 하긴 나잇값을 하는 것은 정상적이니 비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표현을 주로 할 수밖에 없겠다.
야곱의 말년을 기록한 성경을 추적하면서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 족장 야곱을 보게 된다.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났을 때 연세가 몇이냐고 묻는 바로에 게 한 야곱의 고백이 참 인상적이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면서 바로왕을 축복한다. 누구에게든지 축복할 수 있는 것은 나잇값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야곱은 그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 욕심으로 인해 그의 조용한 성격 하고는 딴판인 사람으로 그가 고백한 대로 험한 세상을 살았던 족장이었다.
하지만 노년이 되었을 때는 그는 무르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노년기의 그에게서 우선 탐심이 없어진 것을 본다. 그는 본래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야곱의 130년 인생은 험난했지만, 그는 그 험난함을 승화시켜 자기도 복된 사람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야곱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발꿈치를 잡다’ 또는 ‘뒤쫓는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성경에서 그가 태어날 때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붙여졌다. 참 묘한 일은 야곱의 일생이 이름대로 되는데 나쁜 쪽으로 되어간다. 하지만 그의 노년의 모습은 달랐다. 야곱은 교활하고 속이는자‘에서 ’이스라엘‘로 거듭났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후 얻은 이름으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또는 ’하나님이 승리하시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그 후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는 이름이 되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80세가 넘어서 피를 토하는 큰 병에 걸렸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위독했지만, 당시 대작 <파우스트>를 마무리하고 있던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세상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아 물러가라!“라고.”강력한 의자로 병을 이겨낸 그는, 무사히 대작 <파우스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은 평생 활력이 넘쳤다. 수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그 자신도 만족한 삶을 살았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당당한 풍채였고, 한 마디로 압도적인 인상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신속하고 단호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마치 청년과도 같았다. 괴테의 풍모가 느껴지는가? 세상에 수많은 위대한 작품과 사랑을 남긴 그의 삶은, 누구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넘쳤다.
또 한 살 먹었다. 새해 나잇값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이 들고 늙는 그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완숙이 없이 육체만 늙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진실로 싫어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외형의 주름살이나 구부러진 허리가 아니라, 아직도 다스리지 못한 욕망을 덕지덕지 내보이며 생리적 연치만 내세워 심술을 부리는 그런 노년의 상태일 것이다. 집안에도 그렇고, 나라에도 그렇고, 진정한 어른이 건재하고 사랑과 활기에 찬 노인이 계시는 곳은 눈부실 것 같다.
나태주 시인은 <뒷모습>이라는 시에서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다. 뒷모습은 ’또 하나의 표정‘이며, 거짓말을 할 줄 모든다는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도 <뒷모습>이라는 사진집에서 뒷모습은 정직하며, 앞모습처럼 억지로 웃음 짓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시인의 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늙고 싶다.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니다. 나잇값을 하려면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나잇값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