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과 유럽 정계가 ‘엡스타인 파일’ 문제로 들썩이고 있다.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동생 앤드류 왕자가 왕족 직위를 박탈당하고 경찰에 체포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2028 LA올림픽 조직위원장도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는 자신의 불륜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유럽에서는 노르웨이 전직 총리가 기소되고, 노르웨이와 벨기에 왕족들이 망신을 당하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국회 청문회 출석을 앞두고 있다.
‘엡스타인 파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난리일까? ‘엡스타인 파일’은 2019년 사망한 월스트리트 거물 제프리 엡스타인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서류와 이메일, 자료 등이다. 엡스타인은 수십명의 미성년자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혐의로 검찰에 체포된 후, 재판 직전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에 검찰이 압수한 엡스타인 수사 관련 서류를 공개하여, 엡스타인과 연루된 자들을 밝혀내라는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이 지난해 10월 통과됐다.
법에 따라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엡스타인 관련 수사 기록 300만장을 공개하고 있다. 엡스타인 파일이 공개되자 언론은 일제히 움직였다. 어떤 유명인이 거명됐는지, 누가 엡스타인 소유 섬에 갔는지, 누구의 이름이 몇 번 등장했는지. ‘조회수’를 노리는 언론의 선정적인 헤드라인이 인터넷을 장식했다.
그러나 정작 ‘엡스타인 파일’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뒤로 밀려나고 있다. 조지타운 대학 미셸 굿윈 교수(Dr. Michele Goodwi)는 “공개된 문서 일부에 피해자의 이름과 사진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채 포함되어 있었다”며 “미국 법조기관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또 한 번 노출시키는 순간”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우리 사법 시스템이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의 민낯이다.
성폭력 피해자이자 인신매매 방지기관 자원봉사자인 코트니 리트박(Courtney Litvak)의 증언은 더 직접적이다. 그는 17세에 성매매 조직에 관련된 후, 고교 시절 다른 성범죄를 신고한 뒤 표적이 됐다. 그는 “나의 신고에 수사기관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가해자의 말—”아무도 너를 믿지 않는다“—이 현실이 되어버렸다”며 “성폭력 신고는 보호가 아니라 보복의 시작점이 됐다”고 말한다. 사법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침묵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생존 전략이 된다.
미국내 통계는 성매매 방지의 구조적 실패를 수치로 증명한다. 미국 내 인신매매 사건 중 유죄 판결로 이어지는 비율은 1%에도 못 미친다. 성매매와 인신매매가 연간 2450억 달러 규모의 글로벌 산업이 되고, 고수익·저위험 범죄로 평가되는 이유다. 가해자에게 인신매매는 합리적 선택이고, 피해자에게 신고는 비합리적 도박이 되는 구조다.
‘공소시효’도 문제다. 미국내 많은 주에서 미성년 피해자가 성년이 된 후 제소할 수 있는 기간을 제한한다. 어린 시절의 학대를 고백하고, 법적 절차를 밟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설계다.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려 해도, 법은 ‘공소시효’를 이유로 처벌을 거절한다.
더구나 한인 등 이민자 여성들의 성폭력, 인신매매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성폭력 생존자 지원기관의 카르멘 맥도널드(Carmen McDonald)는 “이민자 피해자들은 추방의 두려움, 언어 장벽, 과거 강요된 범죄 전력 때문에 신고를 꺼린다”며 “T비자 같은 보호 장치가 있지만 강화된 이민 단속 분위기 속에서 활용조차 어려우며, 가해자들은 이를 알고 체류 신분을 협박 수단으로 삼는다”고 지적한다.
엡스타인 파일 공개는 미국내 성폭력과 인신매매 실태를 돌아볼 좋은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는 유명인의 이름을 소비하는 데 있지 않다. 공소시효 연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명확한 법적 절차, 신고 초기부터 작동하는 체계적 대응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있다. 사법 시스템을 피해자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데 있다. 미국내 인신매매는 현재진행형이다. 엡스타인은 죽었지만 그가 이용한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