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의 유령이 미국 유권자의 투표권을 억압하게 될까?
지난 2월 연방하원은 ‘미국 유권자 자격 보호법안(SAVE America Act)’을 찬성 218(공화 217명, 민주 1명), 반대 212(민주 212명)으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현재 연방상원에 올려져 있다. 상원은 공화 53명, 민주 45명, 무소속 2명으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막을 60명 지지에 못 미쳐 표결이 미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법안을 자신의 책상에 가져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다른 법안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이 법안이 왜 문제일까? 명분은 부정선거를 막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유권자들의 선거 참여 의지를 꺾는 투표권 억압인 탓이다. 미국 유권자 1억7400만명 가운데 이 법안이 요구하는 시민권 증명 여권과 신분증이 없는 사람이 무려 2100만 명(12%)에 달한다. 이들 다수는 저소득층, 소수계 유색인종이다. 우선 여권이 없는 시민권자가 1억46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0%다. 여권이 없으면 미국 태생은 출생증명서로 시민권을 증명해야 하고, 이민자는 시민권 증서를 제시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처럼 모두가 주민등록증을 받는 나라가 아닌 까닭이다. 결국 이 법이 만들어지면 수많은 유권자들이 비용 등 여러 어려움으로 투표를 포기한다.
그런데 시민권 증명을 왜 자꾸 하라는 것인가? 부정선거, 투표 사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거는 없다. 수십 년간의 연구 결과 기획된 부정선거는 한 번도 없었고, 비시민권자가 투표를 한 이른바 ‘선거 사기’도 정보 부족과 실수에 따른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42개 선거구, 2350만 표를 조사한 결과 30건의 불법 사례가 적발됐다. 0.0001%였다. 미시간주 2024년 대선에서 570만 표를 조사했더니 15~16건이 발견됐다. 0.00028%였다. 지난해 조지아주에서도 820만 명 가운데 9건이 발견됐는데 약 1100만 분의 1(0.00000011%)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무시하고, 증거도 없이 끊임없이 수백만 명이 불법 투표를 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투표권 억압에 이용하려고 한다.
이 법안은 또 우편투표도 극도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아 노골적으로 전체 투표율을 낮추려고 한다. 트럼프는 지난해 행정명령으로 시민권 검증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연방법원의 위헌 판결로 겨우 막았다. 그랬더니 이제는 입법부를 통해 법으로 제정하려는 것이다.
트럼프는 또 선거 관리를 연방정부가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이 또한 헌법 제1초 4항과 수정헌법 제10조 ‘선거관리 권한은 각 주정부에 있다’는 규정에 위배된다. 트럼프의 압박으로 27개 주정부에서 투표권을 억압하는 법안들이 상정됐고 일부 통과된 곳도 있다. 다행히 대다수는 위헌 판결에 막혔다.
트럼프는 심지어 투표소에 이민단속국(ICE) 요원들을 투입하겠다는 위협도 했다. 연방법은 투표소에서의 협박을 중범죄로 취급하는데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이에 맞서는 시민사회와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헌법에 보장된 시민들의 투표 권리를 지키기 위한 지속적인 감시와 행동, 연대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