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열 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 그 날, 나는 고향을 떠났지만 금강산만은 내 안에 남겨 두고 온 듯하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금강산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을 파고들 때면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멀리서 바람처럼 한 여인이 걸어온다. 세월을 초월한 맑고도 서늘한 눈빛. 조선의 명기 황진이, 그녀가 다시 내 곁에 선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도 우스울 만큼 마음이 부산해진다. 노인의 가슴이 이토록 소란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앞질러 가고, 괜스레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마치 오래전, 첫사랑을 만나러 가던 소년처럼 말이다.
금강산도 금강산이지만, 오백 년을 건너온 그 여인과 나란히 길을 걷는다는 생각에 은근한 기대가 스며든다. 한편으로는, 이 늙은이가 혹여 그녀의 눈에 초라하게 비치지나 않을까 싶어 괜히 허리를 곧추세우기도 한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아는 듯,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다. 그 미소 하나에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나는 소년 같은 설렘을 품은 채 황진이와 함께 금강산으로 향한다.
그녀가 세월을 건너 내 앞에 서서 맑고도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어딘가 낯설고 무겁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그 위를 덮고 있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금강산은 여전히 빼어나다. 만물상은 기이하고, 구룡폭포는 장쾌하며, 봉우리마다 서린 기운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드리워져 있다. 사람의 발걸음과 마음을 가르는 경계, 자유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선이 산의 숨결을 어딘가 답답하게 만든다. 그때였다. 한참을 침묵하던 황진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 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건만, 사람의 마음은 어찌 이리 달라졌는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요.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쫓기고, 또 편안함에 길들여져 스스로를 낮추기도 합니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버린 것이지.” 그 말은 바람보다 더 차갑게 가슴을 스쳤다. “요즘 사내들은 어떠한가.” 그녀의 물음에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나 속은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옳고 그름 앞에서 머뭇거리고, 손해를 두려워해 물러서기도 합니다.” 황진이의 눈빛이 번뜩였다. “기개 없는 사내가 어찌 세상을 논하는가. 자신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꾸짖음이었으나 동시에 깊은 연민처럼 들렸다. 잠시 후, 그녀는 뜻밖의 고백을 꺼냈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뭇 사내를 홀린 여인이라 말하였지. 허나 그들이 스스로 무너진 것을, 어찌 나의 탓이라 하겠는가.”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던 까닭은 기교나 미색에 있지 않았다. 나는 나를 속이지 않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사랑을 하되 계산하지 않았고, 이별을 하되 미련에 매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사내들이 나를 보며 무너진 것은, 내게서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유, 기개, 그리고 진심…”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사내들이여, 여인을 탓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라.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다.” 그 말은 꾸짖음이 아니라, 오래된 가르침처럼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금강산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천 년의 바위는 웃고 있건만/사람의 마음은 쇠사슬에 묶였구나/물은 흐르되 길을 묻지 않는데/어찌하여 사람은 스스로 길을 막는가.”
산을 내려오는 길, 나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금강산의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의 여정은 내게 잊고 지냈던 어떤 마음을 다시 건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은 단지 고향의 산천만이 아니었다. 가슴 뛰던 시절, 무엇에도 주저하지 않던 마음,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진심으로 마주하던 그 순정이었음을. 어느새 그녀는 내 곁에서 조금 앞서 걷고 있었다. 바람결에 스치는 옷자락이 여전히 가볍고도 당당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 길을 나설 때 느꼈던 그 설렘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서 잔잔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 나이에도 이런 마음이 남아 있다니…’
나는 속으로 작게 웃는다. 늙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설렘도, 그리움도, 그리고 사람을 향한 마음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문득 그녀가 뒤돌아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 미소는 마치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한다. 그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 또 한 번 웃음이 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산길을 내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다. 이 길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다시 애틀란타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날의 금강산과 그녀의 미소는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어느 고요한 날 다시 눈을 감으면 나는 또다시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소년처럼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 길을 나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