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뒤, 교수대로 향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광기 어린 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명령을 아무런 반성 없이 수행한, ‘사유 불능’ 상태의 평범한 관료였다.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거대한 조직 안에서 자신의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했을 뿐이었다. 그 행위가 수많은 유대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끝내 도덕적 성찰을 하지 않았다. 악행은 참혹했지만, 악인은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이것이 두려운 이유는 절대악조차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악은 요란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무심함과 침묵, 그리고 질문하지 않는 습관 속에 조용히 스며든다. 이 ‘무사유’는 과거의 특정 인물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그것이 얼마나 쉽게 반복되는지를 르완다 집단학살에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웃을 죽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반복되는 선동과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라디오는 특정 집단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했고, 사람들은 그 언어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성도 함께 무너졌다.
문화대혁명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정의와 혁명을 외치던 구호는 곧 광기로 변했다. 학생들은 스승을 고발했고, 가족은 서로를 의심했다. 비판은 금지되었고, 의심은 죄가 되었다. 개인의 판단은 집단의 열광 속에 녹아 사라졌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도 기억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많은 이들이 순응했다. 그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생각하지 않는 순응은 때로 생명을 앗아간다. 거대한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지 않는다. 질문을 생략하는 습관, 책임을 남에게 맡기는 태도, 다수의 의견에 안주하는 심리가 쌓일 때 사회는 서서히 무너진다.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먼저 편을 정한다. 사람들은 이해하기보다 진영을 선택하고, 설득하기보다 상대를 침묵시키려 한다. 댓글과 SNS는 대화의 장이 아니라 분노와 확신이 충돌하는 전장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응하는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확증편향은 이 무사유를 더욱 강화한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우리는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다.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각자의 ‘사실’이 만들어지고, 의심은 배신이 되며 성찰은 약점이 된다. 결국 사회는 공통의 현실을 잃고 각자의 확신 속에서 분열된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상태가 점점 ‘정상’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과격한 언어도, 무책임한 주장도 금세 익숙해진다. 그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멈추지 않고,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현대판 아이히만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된다. 생각하지 않는 순간, 누구나 그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 집권자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광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역사는 너무 자주 그렇게 흘러왔다. 권력은 늘 달콤한 언어로 순응을 요구했고, 대중은 편안한 침묵을 선택했다.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누군가 대신 생각해주기를 원했다. 그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자유는 사라지고, 책임은 무너지고, 결국 그 대가는 국민 자신이 치렀다.
함석헌 씨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각하지 않는 국민은 결국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깨어 있지 않으면 위정자의 술수와 농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양심 위에서만 살아남는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확인하려는 태도.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힘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반응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잡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무사유의 흐름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붕괴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무사유’에서 시작된다. 댓글 하나, 판단 하나, 침묵 하나가 쌓여 만들어지는 균열이다. 광란은 언제나 요란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 하나를 생략하는 순간, 아주 조용히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집권자들이 끊임없이 헌법적 한계를 인식할 때 작동한다. 생각하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리고 그 위험은 늘 평범한 얼굴로 나타난다.
AI와 첨단 과학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질병, 재해, 죽음, 그리고 감정적인 고통 앞에서 약한 존재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졌다. 자신이 불완전함을 알기에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유 과정 자체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파스칼이 남긴 말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바로 앞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수증기 한 방울로도 죽을 수 있을 정도로 갈대처럼 연약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이 명언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한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