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어느 화요일이었다. 다운타운에서 가진 사회단체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온 남편이 싱글벙글 다가왔다. 그리고 내 친구라는 여자가 자신의 팔에 끼고있던 팔찌를 빼서 나에게 주라고 했다며 아름다운 은팔찌를 내밀었다. 키티.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완전히 잊고 살던 키티가 과거에서 훌쩍 찾아왔다.
오래전에 자주 만나던 친구였는데 어쩌다 연락이 끊어졌다. 그녀는 해군으로 20년, 나는 공군으로 22년 복무했고 비슷한 나이의 딸 둘을 키우던 공통점에 나이도 같아서 쉽게 친해졌다. 그녀가 보내준 무한대를 떠올리는 디자인의 은팔찌에 새겨진 성모경을 읽으며 18년 전에 그녀를 땅 위의 천사라 부르고 쓴 글이 생각났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천사가 있다. 소문내지 않고 이웃을 따스한 손길로 돌보는 땅 위의 천사를 보면 내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자신이 부끄러워 진다.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로 고생하셨던 키티의 아버지는 백 년이 넘는 고옥에서 그의 젊음을 훔친 2차대전의 유물들과 책들에 둘러싸여서 사신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 손 볼 곳이 많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나이든 아버지는 보수를 미루어 왔다.
키티는 그녀 아버지의 고옥을 개조하는데 직접 나섰다. 인건비나 재료 값이 엄청나서 큰 작업은 청부업자에게 맡기고 나머지 작은 수리는 퇴근후나 주말에 직접 한다. 방 하나씩 수리하곤 허리 좀 폈다가 다시 다음 방을 고친다. 3층에 있는 도서관까지 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리는 아버지를 위해서 집안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낡은 전기시설도 바꾸면서 벽과 바닥까지 온통 디자인을 변경하며 집안 내부를 완전히 새집으로 만들고 있다.
키티를 도우는 중년의 흑인 남자가 있다. 사람 좋고 잘 웃는 그는 키티의 아버지 정원을 돌보아 왔는데 키티의 오른손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집수리를 돕고있다. 공영주택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정원사 부부는 매일 열심히 일을 해도 쨍하고 해뜰날을 못 만났다. 올 초에 몽고메리 다운타운에 있는 한 낡은 집이 매물로 나왔다. 팔리지 않으면 철거될 상황이었다. 전세기 말에 유행했던 아름답고 독특한 조각이 새겨진 정면과 하얀 나무 울타리를 가진 귀여운 집이다. 고옥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돌아보고 “멋지다” 외쳤지만 손봐야 할 것이 워낙 많은 집이라 나는 슬쩍 스쳐보고 지나간 집이다.
몇 주를 생각하던 키티가 용단을 냈다. 검소한 생활하며 노후위해 알뜰히 모아온 저축을 털어서 그 집을 샀다. 고옥을 보존하고 싶었고 그녀를 돕는 정원사 부부에 대한 사랑도 깊었다. 그녀는 집의 열쇠를 바로 정원사 부부에게 넘겨줬다. 한번도 제 집을 가져보지 못하고 방 하나의 공영주택에서 살아온 부부에게는 꽃을 가꿀 수 있는 아담한 정원이 딸린 방 3개의 독채에 살고 싶던 꿈이 이루어졌다. 공영주택에 내는 두 자리 숫자의 월세만 받기로 하고 이들이 평생 살 수 있도록 주선해준 키티의 선행에 친구들은 감동해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경제적인 여유가 많아서 베푸는 자선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줄여서 나눈 사랑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열쇠를 받은 날 바로 이사한 부부는 무척 행복하다. 주머니가 비어서 허전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편안하다는 아름다운 천사를 친구로 갖고 있는 나도 더불어 행복하다. 그리고 이렇게 주위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천사가 있어서 땅 위 사람들의 세상도 천국이라 믿는다.
은팔찌를 끼고 나는 키티를 찾았다. 전화번호나 이메일이 단절되어서 그녀가 일하던 몽고메리 시청 부서에 연락하니 퇴직한 후의 근황을 몰랐다. 옛집을 찾아가도 그녀는 이사 갔고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은 흘러간 물이었다. 마침내 성모경이 새겨진 은팔찌로 나에게 돌아온 그녀와 만나서 그동안 변한 상황을 나누며 빠르게 세월을 메꿨다. 키티는 97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끝까지 돌봤고 정원사 부부의 마지막도 지켜주고 돌본, 진정으로 땅 위의 천사다.
우리의 딸들은 모두 결혼했고 우리는 각자 손자 셋을 가졌다. 귀여운 손녀는 없지만 천방지축 사내녀석들 사진을 나눠보며 행복한 할머니들이 되었다. 바쁘게 활동하던 시절 보내고 이제는 삶의 여유를 가진 우리는 손목에 찬 성모경 팔찌를 맞댔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 축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