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의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현실감을 잠시 잊은 듯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그들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의료진들이 번갈아 가며 상태를 살피고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분주한 그들의 움직임 속에 흐르는 긴장감으로 예사롭지 않은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이상하게도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늦은 저녁,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아버지가 어린 딸을 바라볼 때의 온기가 느껴졌다. 설명할 수 없지만, 너무도 선명하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낯선 이방인이 아닌, 누군가에게 지켜지고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잠시 머물다 아무 말없이 나갔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들어온 당신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다 침대 끝 언저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더니 다시 나갔다. 불을 꺼달라고 부탁했던 터라,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당신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의사일 것이라 짐작했을 뿐, 당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당장 큰일이라도 치러야 하는 병에 걸린 걸까.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를 둘러싼 분위기 만으로도 상황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이 한 참 복잡해질 무렵, 늦은 저녁이 되어서 당신이 다시 들어왔다. 침대 발 언저리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듯하더니, 발 위에 얹은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기도한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순간,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마음 한가운데가 조용해졌다. 마치 시간이 잠깐 멈춘 듯, 그 짧은 장면 안에 평화로움이 머물렀다.
당신은 내 옆으로 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당장 수술이 필요한 응급 상황이라고, 원한다면 대학병원으로 연결해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수술하겠다고 덧붙였다.
보통의 나였다면 망설였을 것이다. 지인을 찾고, 정보를 모으고, 남편과 상의하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내 곁에 다가온 당신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더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선택은 이미 끝난 것처럼 망설임 없이 말했다.
“당신에게 수술을 받겠습니다.”
왜였을까. 당신의 실력을 알았던 것도,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에게 내 생을 의탁했다. 당신의 눈빛 때문이었는지,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던 모습 때문이었는지. 어쩌면 그 둘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수술 전 당신이 내게 조용히 물었다. 잠시 기도를 해도 되겠냐고, 고맙다는 내 말이 끝나자 당신은 내 발끝에 손을 올린 뒤 기도를 했다. 자신의 손을 통해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수술을 잘 마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내게
“걱정 말아요, 하느님이 당신 손을 잡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내 안의 불안과 수술실로 향하던 공포가 사라지며 평화가 찾아왔다. 긴 복도를 지나며 다가올 고통을 직감했지만, 내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의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따뜻함을 만났다. 그 온기는 무한한 신뢰와 믿음으로, 결과가 무엇이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게 했다. 수술 후 고통과 기나긴 회복, 그리고 항암치료의 과정 속에서도 그 힘은 여전히 나를 씩씩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 사람의 ‘당신’에게 몸을 맡겼고, 또 다른 ‘당신’에게 마음을 맡겼다.
그리고 그 두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