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생각 난 것이 있어서 남편에게 “1988년 5월 8일, 무슨 날인지 기억해요?” 물었더니 한참을 갸웃하던 남편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데이비드를 데리고 내가 근무하고 있던 한국을 방문한 날” 이라 알려주니 남편은 씩 웃고는 바로 데이비드에게 연락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 놀랍게도 데이비드는 그때 해외여행을 했다고 정확하게 답했다.
켄터키주에 사는 데이비드는 남편의 오랜 친구다. 그는 2살때 걸린 폴리오로 전신에 심한 비틀림이 있어서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산다. 대학시절 룸메이트로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두 남자는 장난치듯 지혜롭게 세상의 도전을 헤쳐왔다. 이제 80대초인 두 남자는 스피커 폰으로 오래전 독일과 한국에서 만든 추억을 꺼냈다. 그들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며 회상하는 옛일을 나는 조용히 들었다.
1980년대 중반, 독일에서 근무하던 나는 데이비드를 처음 만났다. 그는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음식을 적재하는 화물차의 편편한 선반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그는 대합실에 도착하자 특별 우대를 받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남편은 그를 끌어안은 후에 휠체어를 잡았지만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중증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내 놀람이 너무 컸었다.
그날 켄터키에서 출발해서 대서양을 건너오며 겪은 수 많은 에피소드를 우스개로 풀던 데이비드에게 나는 감동받았다. 특히 장애를 도전으로 대응하는 데이비드의 자세가 좋았다. 그에게 열심히 독일의 명소를 보여줬고 그때 우리가 주말마다 하던 걷기행사인 Volksmarch를 이야기하니 그도 나섰다. 돌뿌리나 나무뿌리가 엉킨 거친 비탈길이나 휠체어가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던 곳에서 데이비드는 땅을 기어서 헤쳐나고 남편은 휠체어를 들고 뒤따랐다. 지나는 사람들이 다칠까 걱정했지만 두 남자는 온통 웃음판을 만들었다. 우리가 무사히 10 킬로미터 여정을 마치고 흙과 땀 범벅이 되어서 종착지에 도착하니 먼저 걷기를 마치고 마을회관 안에서 쉬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쳐줬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두 남자의 뿌듯한 모습은 신선했다.
그리고 2년 후, 대서양을 건넜으니 이번에는 태평양을 건너자고 작당한 두 남자가 내가 근무하던 한국을 찾아왔다. 1988년 서울은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별로 없었다. 울퉁불퉁한 도로나 계단은 끊임없는 고초 길이었다. 그래도 희희낙락한 두 사람을 따라 걸으면서 지나는 사람들이 “쯧쯧 집안에 있지 왜 밖에 나와서 고생한담” 하며 딱하게 보거나 혹은 징그러운 괴물을 보듯이 준 눈총이 우리를 따라와서 마음이 아팠다.
서울의 고궁을 들린 후 민속촌에 가서 만든 일은 완전 코미디였다. 주막에서 처음 마신 동동주로 기분 좋게 취한 남편이 일어나 힘껏 휠체어를 밀며 뛰었다. 곧바로 휠체어가 옆으로 넘어지며 데이비드는 땅에 고꾸라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주모들이 놀라 달려와서 바닥에 엎어진 데이비드를 잡아서 흙을 털어주며 남편을 꾸짖었다. 바르게 세운 휠체어에 앉는 것을 돕고 그들이 떠나자 말은 못 알아 들었지만 눈치로 미안해 하던 두 남자는 여전히 취기로 키득거렸다. 데이비드가 다치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 내리는데 데이비드가 남편에게 “한번 더 힘껏 밀고 달리라” 부탁했다. 내가 “미쳤냐?” 화냈더니 데이비드는 능청스럽게 주모들의 손길을 한번 더 받고 싶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경주에 갔을 적이다. 가는 길에 신라의 역사와 불국사를 설명하니 데이비드의 호기심이 커졌다. 그런데 불국사 입구에 있던 돌계단을 보고 망연했다. 우리가 계단 아래에서 머뭇거리는데 한 젊은 남자가 휠체어의 한쪽 바퀴를 잡고 남편을 도와서 무사히 계단을 올라가 대웅전 앞에 갔다. 불당 안을 살펴보고 석가탑과 다보탑을 돌았던 데이비드는 오랜 세월을 지킨 보물들을 놀라워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갈 방안을 궁리하는데 이번에도 건장한 남자가 다가와 데이비드를 업고 계단을 내려와 줬다. 오늘 데이비드와 남편은 명소보다 한인들의 훈훈한 정을 기억했다.
서로를 거울로 비추는 두 남자의 우정은 긴 세월만큼 깊다. 데이비드가 남편에게 독일과 한국을 여행하고 좋은 추억을 만들게 해준 것을 고마워했다. 해외여행의 체험이 그의 마음에 멋진 세상의 그림으로 남았다. 남편과 데이비드의 목소리에 얼굴 둘이 겹쳐진다. 두 사람은 여행 중에 많이 들었던 “Crazy Americans”가 아니라 주어진 레몬으로 쥬스를 만들며 사는 사람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