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식물을 돌보며 살아왔다. 결혼 후 새집에 처음 들였던 스킨답서스 화분을 대나무 바구니에 넣어 천장 코너에 달아 놓고 덩굴이 천장 가를 타고 띠를 두르 듯 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은 푸르름이 더 해질 수록 생명의 기운으로 내 삶도 함께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싱그러운 잎사귀들은 풋풋한 신혼의 공기와 함께 집 안을 채웠고, 그 푸르름 속에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꽃시장을 서성이며 새로운 아이들을 들여왔고, 내 손길 아래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여러 번의 바다 건너 해외이주때도 늘 새로운 아이들을 데리고 와 푸르름의 끈을 놓치 않았다. 식물마다 어울리는 화분을 찾아 갈아 입히는 일도 즐거웠다. 꼭 맞는 옷을 입혀준 듯한 만족감에, 자식 바라보듯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곤 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나이가 들면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 안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미니멀한 생활을 시작했다. 자연스레 새로운 식물을 들이는 일도 멈추었다. 가구를 줄이고, 옷과 장식품을 비우면서 식물에 대한 호기심도 조용히 접혔다.
그동안 집을 오래 비울 때면 가까이 사는 딸에게 물주기를 부탁하곤 했지만, 한 달 넘는 여행을 앞두고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오랫동안 혼자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연약한 아이들은 이웃에게 보내며 놓아 두었던 자리를 볼 때마다 보낸 아이들이 떠오르겠지만 가서 잘 자라주길 바라며 마음을 다둑이며 보냈고,생명력이 강한 남은 식물들에게는 커다란 지퍼백에 물을 채워 바늘로 작은 구멍을 내어 조금씩 스며들게 했다.
“부디 잘 버텨주기를.” 그렇게 속으로 부탁하며 집을 나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차창 밖으로는 온통 식물 생각뿐이었다. 잘 지냈을까.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까. 문을 열자마자 예상대로 스파티필름 하나가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가방을 내려 놓고 곧장 물부터 흠뻑 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몇 장의 마른 잎을 달고 있었지만, 대체로 꿋꿋하게 버텨준 모습이었다. 물을 들이켜자마자 잎들이 다시 대를 세우며 푸른 기운을 되찾았다.
쓰러져 있던 아이의 밑동을 잘라내자, 그 아래에서 물을 머금은 두 촉의 새 순이 단단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가위 끝에 걸린 누렇게 마른 가랑잎 하나 스스로 마르며 아래의 새순과 다른 잎들을 지켜낸 작은 희생이었다. 그 기특함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는 잘려 나간 그 까슬한 잎을 한참 동안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조용히 어루만졌다.
그 순간, 오래 함께한 식물들이 단순히 ‘집 안의 초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돌보아 왔다고만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도 나를 묵묵히 지탱해주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아무 말없이 제자리에서 푸르름을 내어주며 나를 다독여준 존재들이었다.
손바닥 위의 가랑잎은 이미 생을 다했지만, 그 마른 결 사이에는 오래 버틴 시간과 조용한 헌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잎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그것이 남긴 마지막 역할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일은 때로 이렇게 조용한 희생을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에 띄지 않게 마르며 다른 생을 지켜낸 잎처럼, 우리 삶에도 말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며 누군가를 살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은 흔히 잊히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잘려 나간 잎을 바라보며, 비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비움은 단순히 덜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남아있는 것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이었다.
그 작은 잎은 이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지만, 그 잎이 남긴 조용한 가르침은 내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다시 푸르러질 아이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