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에 보랏빛 작은 종들이 한가득 매달려 있었다. 햇살은 울창한 가지 사이 작은 틈새를 뚫고 나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반짝이며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신비로우면서도 고귀한 빛깔은 환상적인 자태로 다가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같았다. 낯선 땅에서 길 잃은 이방인 같은 나를 누군가 보랏빛 품에 감싸 안아주는 듯한 순간이었다.
“이 나무 이름이 뭘까?” 꽃이나 나무의 이름에는 무심하게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궁금증을 품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자카란다’
처음 이 나무가 줄지어 선 길을 본 곳은 샌디에고였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그 도시의 공식 나무라는 것과, 켈리포니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흔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가 처음 마주한 그 풍경은 시간이 정지된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거진 가로수들이 만들어 낸 보랏빛 터널 속을 걸을 때, 바라본 풍경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신비롭고 오묘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꽃을 보면 코끝으로 가져다 향기를 맡는 게 자연스럽지만, 자카란다는 눈으로만 보아도 이미 향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보랏빛 물결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머릿속에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나는 오래전 진해에서 보았던 벚꽃을 떠올렸다. 바람에 흩날리던 하얀 꽃잎들, 그 순간의 아득한 영상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풍경 앞에서 느꼈던 청춘의 두근거림, 스무 살 갓 지난 무렵의 첫 데이트 설렘이 다시 피어났다. 그때의 벚꽃이 젊음의 떨림이었다면, 지금의 자카란다는 성숙한 시간 속에서 만난 고요한 황홀함 같았다.
그러나 바닥을 내려다보니 또 다른 얼굴이었다. 떨어진 꽃은 이내 시들어 형체가 사라지거나, 밟혀 바닥에 짓이겨져 붙어 있었다. 길은 이미 보랏빛으로 가득 덮여 피해 갈 수도 없었다. 고개를 들면 천국인데, 발 밑은 마치 지옥 같았지만 그 또한 묘한 매력이 있었다. 붙이고 뜯어내고, 다시 덧붙이기를 반복하며 만든 추상화는 자연이 빚어낸 또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잠시 머물다 사라질 풍경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싹을 틔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온 햇살에 반짝이는 바닥은 마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친구 집 앞마당에도 자카란다가 한 그루 있었다. 여행지에서 하나씩 모은 수많은 종들을 떠올리며, 그보다 더 우아한 꽃이라며 함께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무가 무성해지자, 꽃이 필 때마다 친구의 마음이 달라졌다. 바닥에 달라붙어 잘 쓸리지 않는 꽃잎들이 지저분하다며 투정을 부렸고, 차고 앞에 흩날린 꽃잎이 바퀴에 눌러 붙는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리에 나무는 사라지고 잘린 둥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허전한 앞마당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는 내게 “골칫거리를 치워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며 친구는 웃었다. 그 말에 나는 괜스레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불편함을 매년 겪어야 했던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를 떠올리면 아쉬움이 컸다.
누군가에게는 눈부신 아름다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가신 짐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자카란다는 환상의 풍경이었지만, 친구에게는 매년 반복되는 수고였다. 같은 나무 앞에서도 위로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이도 있다. 결국 아름다움과 번거로움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떨어져 밟히는 꽃도 그렇다. 어떤 이는 불편이라 말하지만, 어떤 이는 삶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고달픔도, 기쁨도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