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에서 돌아다닐 적에는 복잡한 6-8차선 교통을 피해 시간이 걸려도 나는 뒷길 운전을 선호한다. 신호등이 많고 구불구불한 도로지만 푸근한 여유가 있다. 그런 나의 선택을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연말에 집에 있던 사위가 운전사로 나섰다. 사위는 복잡한 도로에서 쌩하고 지나는 차들과 섞여서 빠르게 지그재그 운전했다. 옆에 앉았던 남편이 전혀 불평하지 않자 뒷자리에 편하게 앉았던 나는 웃었다.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 사위는 시간 낭비를 싫어하고 늘 긴장하는 바람에 나는 그의 마음에 여유를 주기위해 소소한 수다를 했다. 코비드 사태를 지나도 여전히 불안한 환경에서 타인을 믿거나 배려하는 분위기가 사라지는 실태를 이야기하다가 문득 떠오른 일이 있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내가 멕스웰 공군부대로 막 발령받아 왔을 적이다. 친정 엄마가 우리집에 계셨고 몽고메리에는 구멍가게 같은 한인 식품점이 있었다. 마침 남편이 애틀랜타로 출장을 가는 기회가 있어서 이곳에 사는 한인으로부터 받은 한식품점 ‘창고식품’의 주소와 쇼핑 목록을 남편에게 주고 구해 오라고 부탁했다.
창고가 많던 지역에서 ‘창고식품’을 찾은 남편은 목록에 적힌 품목을 카트에 잔뜩 실어서 체크아웃 하려다 문제가 생겼다며 전화를 했다. 창고식품에서 크레딧 카드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수표책이 없고 현금도 많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 묻던 남편에서 계산대에 있는 분을 바꿔달라고 했다. 앨라배마에 살고 있는 한인이라 인사하고 남편에게 식품을 주시면 즉시 수표를 보내겠다고 당부해봤다. 그분은 주인이 아니었다.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 후에 그렇게 해 주셨다. 그 당시 150불이 넘던 식품을 생판 본 적이 없는 타지인에게 외상으로 선뜻 내어준 분, 훗날 찾아가 감사인사를 드리자 ‘김여사’ 라는 분은 환하게 웃으셨다. 그후 이 식품점이 뷰포드 대거리로 나와서 ‘파머스 마켓’으로 크게 확장되었을 적에 그 식품점의 성공에 무척 기뻤다.
그리고 지난 11월, 버지니아에 머물 적에 나는 많은 나무들로 늦가을의 풍취가 멋진 딸네의 동네를 자주 걸었다. 한 집 뜰에서 마른 가지에 달린 감을 보고 멈췄다. 낙엽을 긁던 집주인과 인사했더니 반갑게도 한인 부부였다. 푸른 하늘에 반짝이는 주홍빛 열매를 단 감나무가 모국인들과 어울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했더니 집 주인 은정씨가 그 동네 어느 거리에도 감나무가 있다는 정보를 줬다.
은정씨가 준 감을 집에 가져다 놓고 감나무가 있다던 집을 찾아 나섰다. 낙엽을 밟는 바스락 소리에 취했다가 탐스런 과일들이 무겁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나무 두 그루를 봤다. 사진을 찍고 앞뜰을 지나 문 앞에 가서 벨을 눌렀다. 이중 문으로 단단히 닫힌 문은 응답이 없었다. 돌아서려 는데 안쪽 문이 조금 열리고 한 노인이 배꼼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앞 뜰에 있는 감나무들을 가리키며 “감을 좀 살 수 있을까요?” 물었더니 완강하게 “노” 답했다.
“저 많은 과일을 다 드세요?” 묻자 그는 감으로 잼을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 더니 감을 담은 백을 내 손에 쥐어줬다. 돈도 안 받고 과일을 나눠줘서 놀라니 자신은 “크리스찬” 이라 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이 벌컥 화를 내며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린 내 무모한 행동을 질책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느냐고 항의하던 나는 낯선 집 벨을 눌렀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의 뉴스가 떠올라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다음날, 딸에게 애플파이를 구해오라 해서 딸과 함께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문을 살짝 연 노인에게 애플파이를 주며 감사를 전했더니 이번에는 딸에게도 감이 담긴 봉투를 줬다. 따스한 사람살이 나누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며 가게에서 산 과일보다 직접 본 나무에서 자란 감이 더 달콤하다고 딸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한다는 중국어 사람 인 (ㅅ) 자를 떠올리며 사람을 믿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요즘 풍토에 솔직히 이웃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주지 않는 상황이 안타깝다. 앞으로도 타인을 무조건 멀리하는 것보다 배려하는 자세를 지키자고 각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