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22
뜻하지 않은 상실을 겪었을 때 얼마나 빨리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영원히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고개를 든다.
영화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을 AI로 복원해 일상을 함께 한다는 슬프고도 매력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데이터와 기억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스크린 안에서 웃고 말하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행복한 상상에 영화를 보며 나 역시 보고 픈 사람 생각에 미소 지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화는 기대감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길 위에 조심하라며 Speed Bump 를 설치해 놓았다.
정인은 (수지 분) 남자친구인 태주(박보검 분)의 코마 상태를 아쉬워하며 AI 태주를 만든다. AI 태주는 모닝콜은 물론 그날 필요한 준비물을 알려주고 정인에게 풀러팅하는 현실 속 남자에 대한 상담까지, 둘은 모든 일상을 함께 한다. 그런데 어느날 태주가 코마에서 깨어난다. 기적같은 일에 행복은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몇년을 잠만 자고 있던 태주는 현실의 정인을 따라가지 못한다. 인공지능 태주가 일일이 정인을 보살펴 주었다면 현실의 리얼 태주는 오히려 정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은 두 태주의 괴리에서 오는 혼란으로 괴로워한다.
고고학자였던 바이리(탕웨이 분)를 그리워 한 가족은 특히 바이리의 어린 딸을 위해 AI 서비스를 신청한다. 하지만 엄마와의 통화가 계속될수록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깊어지고 아이의 일상마저 흔들리게 된다. 할머니는 원더랜드의 서비스를 종료한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항의 위험지대로 들어간다. 아이의 위험을 느낀 AI 바이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시스템이 정한 설정값을 넘어선 한계치까지 치닫게 되고 시스템은 에러를 일으킨다. 그 에러로 인해 바이리는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통화를 하면서 딸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이다. 영화는 양쪽 끝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하나의 장면으로 담아내면서도 결코 이어지지 않는 반듯한 선으로 그들을 분리시킨다. 마침내 에러가 난 시스템의 소음 속에서 바이리와 딸의 마지막 전화가 이어진다. 바이리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며 언제나 함께 한다는 사랑을 전한다. 어린 딸은 고개를 끄덕인다. 통화가 끝나자 시스템은 정상이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단 한번이라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럴 때 생전 모습 그대로인 사람과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했을 만한 행동과 말을 듣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이 AI인걸 알면서도 크나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죽은 망자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49제라는 전통으로 산사람과 죽은 사람, 둘 모두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기간을 두고 있다. 그 49일동안은 맘껏 비탄에 빠지고 슬픔에 매몰되도 좋다는 것이다. 밑바닥까지 내려 가서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 상처에 새살이 돋고 단단한 무게로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기술 발전과 함께 인공지능이 인간 삶 속으로 영역을 넓혀오면서 상실의 아픔을 마주보는 용기와 극복하려는 의지 대신 대체 즐거움이나 가짜 위로에 매몰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드러내고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진물이 흐르고 곪아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부글거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인의 행동 이면에는 숨은 상처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진정한 사랑이나 모성의 강한 의지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태주와 바이리의 AI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정인은 진정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엄마의 부재를 인지한 아이는 더 큰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떠나 보내야 할 때 보내주는 아픈 이별이 진정한 사랑이 되고 성숙한 삶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감동의 영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