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 봄, 몽골고원의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오논강의 발원지에서 쿠릴타이(부족지도자회의)가 열렸다. 오논강 유역은 테무친이 태어난 고향이다. 이 자리에서 테무친은 몽골고원의 모든 유목민을 통치하는 가장 높은 자리인 ‘칸’에 즉위했다. 칭기즈칸의 탄생이었다. 칭기즈칸은 1207년 중국 서북쪽 변경에 있는 서하를 공격해 무릎을 꿇렸다. 몽골고원을 벗어나 시도한 최초의 정복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것이다. 이것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은 파죽지세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나갔다. 13세기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 아래 유라시아의 모든 왕국이 초토화되었다. 칭기즈칸은 저항하던 서하를 아예 지상에서 쓸어버리고, 사라센 세계의 중심이던 호라즘제국의 도시도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곤 무슬림 세계에 ‘일한국(汗國)’을 세워 직접 통치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가 강력히 저항하자 대도시의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고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송왕조를 없애고 원나라를 세웠다. 그 후 칭기즈칸은 장남 주치의 군대를 보내 러시아와 헝가리 등 유럽을 정복했다.
강철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진다.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다. “집이 가난하다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원망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도 없었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날 수 있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나의 내면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징기즈칸이 되었다.”
이슬람 군대가 유럽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유목 기마 전법을 도입한 결과였다. 군사 기술에서는 항상 초원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슬람화된 투르크족은 곧 초원의 야성을 잃었다. 투르크족보다도 더 야성적인 몽골군대가 쳐들어오자 두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반유목민으로서 기마 전법에도 강했지만, 북중국을 지배하다가 선진화된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버려 본래의 야성을 잃었다. 그러나 몽골은 달랐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한다.”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그의 비문이다. 칭기즈칸 군대는 톤유쿠크 장군의 유훈처럼 성을 쌓고 안주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아가 세계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의 정복사는 동서양의 문명과 문화의 소통을 가져와, 그대로 이어졌으면 수백 년은 족히 더 걸렸을 인류문명사의 발전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증진시켰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지는 칭기즈칸을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를 뒤바꾼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했다. 가장 광대한 지역을 단일 통신망의 영토로 뒤바꾼 인물이라는 것이 그 선정 이유다. 칭기즈칸의 ‘이동하며 세계를 정복한’ 역사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공간의 제약 없이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유목민)의 삶과 이동성, 연결성, 실력주의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인류문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말은 인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동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말은 전쟁과 교역, 탐험을 가능하게 한 이동 수단이자 노동력이었으며, 문명이 형성되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근대 이후 운송수단이 기차와 자동차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옛 기억은 분명히 남아있다. 현대자동차가 처음 독자 생산한 승용차는 포니(조랑말)였고, 에쿠스 역시 라틴어에서 말을 뜻한다. 미국 자동차 머스탱도 북미 지역 야생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탈리아 자동차 페라리는 도약하는 말을 상징으로 쓴다.
2026년은 붉은 말의 해, 병오년이다. 말이 달리면 역사가 깨어난다. 말은 말한다. “길은 앞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이 가는 곳마다 길은 열린다!” 선인들은 말이 달리면 나라가 흥하고 말이 쓰러지면 나라가 쇠한다고 믿었다. 용의 머리를 한 말을 타면 적장의 목을 벨 수 있고, 깨끗한 말을 타면 청렴의 상징이 될 수 있고, 날개 달린 말을 타면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말 위에서 용기와 두려움을 시험했다.
백양나무처럼 흰 몸으로 길을 걸어가는 내 젊음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한때 햇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던 새하얀 날들의 잔광은, 가느다란 줄기처럼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아직도 나를 부르고 있다. 빛이 먼 곳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걸어야 한다. 내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늙은 말은 길 위에 눕지 않는다. 경의선 장단역 철도중단점에는 북녁을 향해 달리고 싶은 염원을 담은 두 대의 철마가 멈춰 서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병오년 벽두 나는 외친다. ‘노마(老馬)는 달리고 싶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매일 매일 새로워진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일신(日新)’의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달리자. 관우의 적토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