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수감사주일에 아내와 함께 몽고메리에 사는 아들 집에 가서 며칠을 함께 지냈다. 방에서 짐을 풀다가 손녀의 서가에 붙어있는 종이 한 장에 눈길이 멎었다. 손녀가 중학교 2학년 때 600 페이지가 넘는 판타지 소설을 썼다는 얘기를 듣고 써준 격려의 편지였다. 영문으로 번역한 또 한 장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손녀가 할아버지의 편지를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가슴이 뭉클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네가 소설을 썼다니 그저 놀랍고 기쁘다. 축하한다. 우리 손녀의 첫 작품을 어서 보고 싶구나. 평소에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네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를 좀 닮은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꼬맹이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너의 쾌거를 보면서 할아버지는 문득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떠올렸다. 미첼은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여류 작가다. 할아버지는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독백을 기억하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의 힘이 되어준 금언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갈고 닦고 노력하거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손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서 아내가 온갖 정성으로 키운 아이다. 우리 부부가 중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손녀는 네 살이었다. 며느리는 워킹맘이었기 때문에 손녀는 일주일에 절반은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손녀가 집에 오는 날 가장 신나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은 할머니가 손녀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펄펄 힘이 났다. “손주 봐주기가 힘들지 않는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손녀 딸 웃는 모습 생각하면 몸 아픈 것도 견딜 만해요!” 할머니에게는 어떤 진통제보다 손녀의 웃음이 더욱 효과적인 약이었다. 무엇보다 절벽 같은 절망의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손녀의 해맑은 웃음과 재롱이었다. 손녀가 집에 오는 날은 집안에 웃음과 활기가 넘친다. 할머니는 그 전날 버스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한국 마켓에 가서 먹거리 장을 봐온다. 손녀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숙제와 공부를 도와주고 함께 놀아준다. 주로 인형놀이였다. 인형놀이는 손녀가 리드했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새록새록 나올까 싶을 정도로 손녀의 인형놀이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인형놀이가 싫증나면 할머니가 사준 만화 성경을 들고 와서 할머니에게 읽어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이미 열 번도 더 읽었을 이야기를 싫증도 나지 않는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조용히 듣는다. 특히 거인 골리앗을 죽이는 다윗왕과 유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에스더 이야기를 좋아했다. 밥을 먹고 나면 빠지지 않는 디저트가 있다. 캔디다. “할머니, 캔디 하나 먹어도 돼?” 이것은 자기 엄마에게는 어림도 없는 말이다. 이가 썩는다는 이유로 절대로 먹지 말라고 금한 간식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인심이 후하시다. “그래 먹어라. 하지만 하나만 먹어야 한다.” 살짝 조건을 붙인다. 손녀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싱크대 서랍을 열고 캔디를 고른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가 또 말이 달라진다. “할머니, 하나 더 먹어도 돼?” 할머니는 이번에도 또 지고 만다. 할머니는 절대로 자기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아버렸으니 하는 수가 없다. “그래라. 하지만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된다!” 둘만의 ‘부정거래’가 이루어진다. 며느리가 절대로 주지 말라는 캔디를 눈감아 주면서 손녀와 할머니는 공범이 되어 기분이 짜릿짜릿해지고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유세하는 며느리에게 복수하는 느낌까지 들어 짜릿한 스릴마저 맛본다. 할머니는 “쉿,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하면서 손녀와 유치하게 약속을 건다. 하지만 둘의 비밀은 그리 오래 가질 못한다.
그렇다. 우리들의 인생은 유치한 것이다. 어린 손주들 앞에선 더욱 유치찬란하다. 유치한 만큼 아름답고 달콤한데 어쩌란 말인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아이와 놀 때는 건성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하는 행위’라고 말한 어느 작가의 말에 나는 백 프로 공감한다. 자식 사랑보다 더한 것이 ‘손주 사랑’이라 하였다. 손주 사랑이 이렇게 유별난 까닭은 뭘까? 혹 나이 듦의 비밀이 거기 있지 않을까. 젊어서 자식을 낳아 기를 때 미처 깨닫지 못한 아이에 대한 사랑을 이제 자식의 자식을 보며 깨닫게 된다. 아이를 낳고 길렀으므로 이제 여유가 생기고, 아이의 편에 서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시기에 이른 탓일까. 우리 같은 노인들은 그 연령대, 곧 그만큼 세상을 살아온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시기이다. 단 한 번의 삶, 그것도 채 100년도 못 되는 짧은 인생에서, 자신과 닮은 ‘또 다른 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종족보존 본능에 속한다.
올해 손녀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해 다시 한번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었다. 이번에 만났을 때 손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콜럼비아대학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각각 선물했다. 티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본다. 백발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다. 마치 나 자신이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다. 손녀는 집안의 자랑이고 보람이다. 헤어질 때 손녀는 할아버지 품에 꼬옥 안겼다. 함께 인형놀이하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항상 ’좋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문득 나태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입속에 맴돈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풀꽃 1에서) 손녀가 자란다. 동시에 우리는 늙어간다. 그리고 한 세대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