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46)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건너 보이는 작은 섬까지~’ 어릴 때 자주 부르던 노랫말이다. 지금 이 노래를 가만히 불러보면 자유와 희망이 담긴 밝고 경쾌한 노래가 아니라, 끝내 이루지 못한 꿈처럼 아련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하늘을 훨훨 날아서 저 건너 보이는 작은 섬에 가더라도 내가 갈구하는 그것은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결말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새가 된 청소부>로 소개된 그림책, <Hey, AL>은 1987년 칼데콧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청소부 알은 작은 집에서 하나 뿐인 친구 개, 에디와 함께 산다. 살림은 가난하고 힘들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부족할 게 없다며 알은 만족하지만, 에디는 지저분하고 마음껏 뛰놀 곳 하나 없는 집에 불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새로부터 일하지 않아도 실컷 먹고 놀 수 있는 신비한 섬으로 초대받는다. 그곳에서 알과 에디는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기지만 섬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사람의 모습을 잃고 점점 새로 변하기 시작한다. 일하지 않아도 실컷 먹고 놀 수 있지만 새로 변해가는 자신들의 모습에 놀란 알과 에디는 “새가 되느니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이제 정말 자유롭게 하늘을 날면서 살 수 있는데,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새가 된다고 새장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과 많은 조류 친구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면 될 텐데…. 책에서는 알과 에디가 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새가 되지 않으려 날개를 퍼덕이며 자신이 살았던 작은 집으로 돌아가 원래대로 인간과 개가 되고, ‘때로는 낙원을 잃는 것이 천국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며 만족한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 살기 위한 교육을 받고, 관계를 맺고, 문화를 익힌다. 이렇게 익힌 경험과 개념이 쌓여 한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이 형성된다. 타인의 기대나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부모, 친구, 교사, 사회적 연결망 등이 건강해야 한다. 그동안 인간으로 살아왔으니, 낙원의 삶을 버리고 힘겨운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알! 또한 헛된 욕망이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 수 있으니, 현재 주어진 삶에 만족해야 한다고 믿는 알! 만약, 처음부터 인간과 새의 모습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새가 된 청소부>가 아니라, ‘새가 되길 거부한 청소부’로 이 그림책을 읽은 내게 떠오른 애니메이션이 있다. 십여 년 전에 본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영화 <곰이 되고 싶어요>이다. 북극 늑대의 습격으로 새끼를 잃고 슬퍼하는 엄마 곰에게 아빠 곰은 인간의 아기를 훔쳐다 주고, 엄마 곰은 극진한 사랑으로 아기를 키운다. 아이는 자신이 곰이라 믿으며 곰의 말과 행동을 익히며 행복하게 살지만, 곰의 뒤를 쫓던 아이의 아버지는 엄마 곰을 죽이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다. 결국 아이는 진짜 곰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산의 정령을 찾아 떠난다.
곰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과 소통하며 살아온 아이가 인간의 삶에 적응하기는 어렵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새로 살아가는 것이 알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힘든 삶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삶이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배우고 익힌 인간에게 ‘저 건너 보이는 작은 섬’은 그저 짧은 여행지로 만족해야 하는 곳일 테니까.
더 큰 집에서 살고픈 인간의 욕망, 일상의 소소한 행복, 그리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정체성마저 바꿔 버릴 수 있는 삶에서 어떤 선택이든 선택할 기회가 있는 삶이 좋은 삶일 거다. 다르게 바라봐야 할 가치관조차 AI에게 묻고, AI의 선택을 듣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새 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