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사이즈 하얀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그림 하나. 내 귀중품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언젠가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노스캐롤라이나 샬럿 공항에서 몽고메리 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게이트 가까이서 기다리고 있었을 적이다. 내가 무슨 생각에 골몰해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았던 한 여인이 다가와 들고 있던 스케치 패드의 한 장을 떼어내서 나에게 줬다.
어정쩡하게 앉은 자세의 사람을 스케치한 것이었다. 얼굴을 자세히 봤다. 반쯤 감은 눈과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은 나를 닮지 않았다. 하지만 목에 두른 스카프나 꼬고 앉은 다리위에 작은 크로스오버 가방을 놓고 그 위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모습은 나였다. 내가 신었던 부츠까지 그녀는 그대로 그렸다. 나를 닮지 않은 나의 그림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했었다. 낯선 여자가 나를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 아래에 이니셜, MWU 적어 넣었고 뒷면에는 그녀의 웹사이트를 적었다.
그녀가 준 그림을 책에 끼워서 가방속에 넣었다. 우리는 함께 몽고메리 행 비행기를 타서 각자의 자리에 앉았고 도착해서 눈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그것을 다른 수집품들 사이에 끼워뒀다. 그리고 잊어 버렸다. 이번에 이 스케치를 찬찬히 다시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살펴봐도 여전히 내가 아니다. 그러나 내 시간의 여유로 그녀의 웹사이트를 찾았다.
아름다운 초록의 물결이 출렁이는 웹사이트에서 그녀가 조경 건축가이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여자임을 알았다. 웨슬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조경 건축가 학위를 받은 그녀는 아름답고 유용한 야외 공간을 창조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그녀는 주위 환경에 어울리는 정원의 모양을 고안하고 어울리는 꽃과 나무를 배려해서 화합 시켰다. 그녀가 창조한 많은 정원 사진들이 소근소근 들려주는 그녀 삶의 스토리를 들었다.
그녀는 과거의 멋진 유산을 현재에 적용하며 30년 이상을 몽고메리에서 활동하며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동안 내가 무심히 보고 지나가는 주정부 청사 앞 정원이나 도시 여러 곳의 뜰을 떠올리니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정원 디자인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노하우를 오랫동안 매달 정기적으로 몽고메리 잡지에 실었다. 내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분야에 그녀의 세계가 있었다.
더불어 그녀는 아이들을 위한 책, ‘Grandmother’s Garden‘ 을 썼고 10년의 리서치 후에 연애소설, 출판계 인사들이 고전으로 칭송한 ’The Garden at Sandys Hall‘ 소설을 썼다. 나는 이 소설을 찾아 읽었다. 영국의 대저택 정원을 무대로 젊은 남녀의 부드러운 감성이 꽃잎으로 흩어지며 아름답게 어울린 스토리였다. 마치 그녀가 창조한 가든처럼 미세한 감성의 흐름에는 사랑의 본질과 진수에 품위까지 있었다.
2009년, 그녀는 몽고메리를 떠나 노스캐롤라이나 블루 리지 산 언덕에 집을 지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구비구비 산 능선의 파노라믹 절경을 보며 하루를 만든다. 구름을 따르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녀 자신의 삶을 자연의 정원으로 멋지게 살고 있다. 어렴풋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예전에 그녀가 준 스케치를 보며 그때 스쳐 지나간 순간을 회상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그녀는 분명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내가 아직 그 스케치를 보관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아쉬워한 그녀의 말에 나도 동감했다.
공항에서 낯선 사람이 준 다정한 제스처, 스쳐간 인연, 그리고 긴 침묵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연결되어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두 여자. 나이가 비슷한 우리에겐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천연 환경을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과 글 쓰는 것,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삶의 자세도 비슷해서 그녀가 찍은 사진들 위에 내가 찍은 사진들이 겹쳐진다. 그리고 그때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인연을 꽉 잡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그 인연의 끈을 잡았다. 이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장거리 친구, 메리를 사귀는 축복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