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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의 살며 생각하며] 바다는 좁고 세계는 넓다: 호르무즈 해협의 역설

김건흡 / MDC사랑복지센터 회원

04/08/26
in 애틀랜타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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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첨단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전장을 분석하고, 위성이 지구 반대편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포착하며, 극초음속 미사일이 시간의 개념마저 무력화하는 시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기술 위에 여전히 군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지형이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이 단순하지만 변치 않는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운다. 세계 석유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통과하는 이 좁은 해협은 지도 위에서는 가느다란 선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는 세계 경제의 ‘숨통’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그 숨통을 쥐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란이다. 미국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국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좁은 바닷길 하나가 세계를 긴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지형은 힘의 비대칭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손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형을 알면 승리하고, 지형을 모르면 패한다.” 수천 년의 전쟁사가 증명한 냉혹한 법칙이다. 삼국지의 수많은 전투 역시 이를 입증한다. 적벽대전에서 연합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하던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그 승리의 핵심은 화공이나 계략 이전에, 강과 바람이라는 지형과 자연조건을 완벽히 이용한 데 있었다. 좁은 수로, 일정한 풍향, 그리고 수군 운용에 익숙한 병력. 이 세 요소가 결합되면서 숫자의 열세는 순식간에 의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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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도 다르지 않다. 이곳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약 30여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거대한 항공모함과 구축함이 아무리 강력해도, 제한된 항로에서는 움직임이 예측 가능해지고 취약성이 커진다. 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을 가진 쪽은 기뢰, 소형 고속정, 해안 미사일과 같은 비대칭 전력을 활용해 상대를 압박할 수 있다. 넓은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던 약점이, 좁은 길목에서는 치명적인 균열로 드러난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하던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해야 했다. 정면 대결이라면 승산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넓은 바다가 아닌, 좁고 복잡한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군을 유인했다. 좁은 수로에서는 대규모 함대가 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오히려 소규모이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그리스 함선들이 유리해졌다. 결국 페르시아의 거대한 함대는 스스로 얽히고 부딪히며 무너졌다. 숫자가 아니라 지형이 승패를 갈라버린 순간이었다. 현대전에서도 지형의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방어를 강화한 항구를 피하고,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하지만 상륙이 극도로 어려운 노르망디 해안을 선택했다. 거친 파도, 넓게 펼쳐진 해변, 그리고 절벽과 장애물은 공격하는 쪽에도 큰 위험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독일군은 이곳을 주 공격지로 예상하지 못했다. 연합군은 지형의 불리함을 역으로 활용해 기습 효과를 극대화했고, 결국 유럽 해방의 결정적인 교두보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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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초크포인트’의 힘이다. 초크포인트는 지정학에서 특히 전시에 인적, 물적 자원의 수송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요충지를 말한다. 길목을 장악한 자는 전장을 장악하지 않고도 전쟁의 흐름을 흔들 수 있다. 미사일을 쏘지 않아도 봉쇄의 가능성만으로도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 실제로 세계 시장은 이 해협에서 작은 긴장만 발생해도 즉각 반응한다. 유가는 출렁이고, 금융시장은 흔들린다. 총성이 울리지 않아도 이미 전쟁은 시작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전은 더 이상 단순한 군사력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지형, 경제, 심리, 그리고 정보가 결합된 복합적 게임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요소 즉, 지형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은 넓다고들 말한다. 대륙은 광활하고, 바다는 끝이 없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단 하나의 좁은 목줄에 묶여 숨을 헐떡이고 있다. 바로 호르무즈 해협. 지도 위에서는 손가락 하나로도 가려질 만큼 좁은 이 바다길이 지금 전 세계 경제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 중동의 검은 피가 이 좁은 해협을 지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흘러간다. 그런데 그 길이 막혔다. 갑작스러운 봉쇄. 순식간에 유조선은 멈춰 섰고, 바다는 더 이상 길이 아니라 벽이 되었다. 그 순간 세계는 깨닫는다. 우리는 넓은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통로 하나에 의존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유가는 폭등한다. 기름값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공장의 기계가 멈추고, 물류는 지연되며, 식탁 위의 빵과 우유 값까지 따라 오른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지구 전체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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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한다. “대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이 좁은 해협을 완전히 대신할 길은 없다. 그래서 세계는 더 불안하다. 바다는 넓지만, 우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은 너무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쥔 자는 총 한 자루 없이도 세계를 흔든다. 이것이 호르무즈 해협의 역설이다. 가장 좁은 곳이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진다. 가장 작은 통로가 가장 큰 위기를 만든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단순한 에너지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경고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촘촘히 연결된 이 문명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 우리는 너무 멀리 연결되어 있었고, 너무 한 곳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넓음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좁음’을 경험하고 있다. 바다는 넓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놀랍도록 좁다. 그리고 그 좁은 길 하나가 막힐 때, 세계는 이렇게까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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