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고국 방문은 여느 때와는 전혀 달랐다. 늘 그렇듯 부푼 마음으로 한국으로 향했지만, 이번 여행은 이전처럼 편안하고 가벼운 시간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겨 어리광부리며 다시 에너지를 채우던 예전과는 달리, 가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다시 깊이 느끼게 되었다.
출발 한 달 전, 부모님께는 갑작스럽고도 연이은 일들이 닥쳤다. 시작은 엄마였다. 친구들과의 여행 중 드신 해산물로 인해 식중독에 걸려 입원하셨다. 그 사이, 아빠는 양손에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 어지럼증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스스로 정신을 차려 119에 신고해 병원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퇴원하시자마자 설 준비를 하시다 무거운 것을 들고 주저앉으셨고, 결국 허리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움직일 수 없어 병원 침대에 누워 지내셔야 했고, 이모와 외숙모, 그리고 친구분들이 번갈아가며 곁을 지켜주셨다. 자식이 둘이나 있지만 모두 해외에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고, 나는 그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애태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도착해 부모님을 마주했을 때,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늘 태산 같던 부모님은 어느새 여든의 어르신이 되어 계셨고, 몇 주간의 병원 생활로 기력은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엄마는 단단한 보호대를 착용한 채 거실 소파에 누워 계셨다. 공항에서 돌아올 때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밥만 푸면 되니 빨리 밥 먹자.”라며 한껏 신이나 반기시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활기차고 여행을 좋아하시던 엄마에게 허리 골절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무겁게 짓누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생도 급히 휴가를 내어 한국으로 들어왔고, 그렇게 20여 년 만에 완전체 넷이 되어 보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었다. 동생은 바깥일을 맡고, 나는 집 안에서 부모님의 일상과 건강을 돌보았다. 그동안 엄마가 당연하게 해주시던 집밥을 대신 준비하며, 매일의 삼시세끼 식사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엄마의 친구분들이 보내주신 반찬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식탁을 채울 수 있었고, 그 따뜻한 정이 큰 위로가 되었다.
집 안도 조금씩 정리해 나갔다. 오랜 기간 쌓여온 물건들을 비워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엄마는 처음에는 못마땅해 하시며 투덜거리기도 하셨다. 하지만 정리가 끝난 뒤, 한결 넓어지고 정돈된 공간을 바라보시며 조용히 미소 지으셨다. 나는 매일 까칠해진 엄마의 얼굴에 팩을 해드리고, 손톱에는 고운 색의 매니큐어를 발라드렸다. 바디로션을 발라드리고 발팩을 해드리는 작은 손길들이 실내에서만 보내는 답답한 하루를 조금이라도 환하게 만들어주기를 희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의 표정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아들, 딸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과 안정이 되어갔다. 식사량도 점점 늘어나고, 빨리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눈에 띄게 커졌다. 우리는 거실에 함께 앉아 간식을 나누고, 영화도 보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외출이나 계획이 없어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깊어갈수록 따뜻한 가족애가 느껴졌다.
부모의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손 안의 모래처럼, 시간은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빠르게 흘러간다. 이번 한국 방문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삶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 어떤 여행보다도 따스하게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동생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어 든든했고, 부모님은 늘 계시던 곳에 계신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거실로 들어오는 온기 가득한 오후 햇살같은 부모님의 존재를 제대로 느낀 특별한 여행이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온 지금도, 나는 여전히 마음 한켠에 남은 안타까움을 안고 산다. 오늘도 전화 통화 연결음 뒤에 들려올 부모님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