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에 사시는 대학선배 한 분이 전화를 하셨다. 뉴욕과 뉴저지에 사는 많은 동문들은 단단한 교류를 하며 친목을 다진다. 선배는 앨라배마에 동 떨어져 사는 외로운 후배를 챙기고 싶어서 연락하셨는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답하고 다른 동문들의 근황을 들으니 보고 싶은 얼굴들이 필름처럼 눈 앞을 지나갔다.
예전에 일본에서 만든 김을 수입해서 미국내 일식당에 공급하시던 선배가 맛있는 김을 박스에 잔뜩 채워서 여러 번 보내주셨다. 미시시피 동생들에게도 갖다 주고 지인 몇 사람과 나눠 먹어도 양이 많아서 오랫동안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아직 우리집 냉동고에 보관된 두 패키지를 볼 적마다 선배님의 미소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 선배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에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몬태나주에 있는 딸네에 다니러 갔던 다른 선배가 그곳에서 보내준 비프 저키도 한 패키지 냉동고에 남아있다. 둘 다 유통기한이 한참을 지났지만 나는 선배님들의 따스한 마음을 기억하며 세상을 떠난 두 분을 그리워했다.
이번에 전화주신 선배는 사업하시는 분인데 취미생활로 미네소타주에서 콩나물 콩 농사를 하셨다. ‘Non GMO’이며 유기농인 콩을 키워서 다른 동문들과 나눠먹던 선배는 나한테도 보내주셨다. 그것은 그저 콩이 아니라 동족과 동문, 한인들의 정 나누기로 내 가슴을 화끈하게 데워준 선물이었다. 박스를 열고 반짝이는 작은 구슬들을 보며 싱글벙글하던 나를 한인들의 콩나물 사랑을 모르는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박스속에는 콩이 꽉 찬 지퍼백이 셋 들어 있었다. 하나는 내 것으로 챙기고 다른 하나는 미시시피 동생들에게 보내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 사는 글동무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빠르게 인터넷에서 콩나물 기르는 방법을 찾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창고에 갔다. 88서울올림픽 당시 한국 근무하고 돌아오며 가져온 박스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석에 있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전자 자동재배기를 집안으로 가져와서 깨끗이 씻고 콩나물 키울 준비를 했다. 이러라고 근 40년 전에 구해온 기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우선 설명서에 따라 콩나물을 키웠다. 매일 자라는 모습은 사진으로 찍었고 5일쯤 후에는 위로 밀치고 올라온 콩나물을 수확했다. 어릴 적에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가게에 가서 콩나물을 산 기억이 났다. 커다란 시루에 덮인 천을 옆으로 치우고 콩나물을 한 주먹 잡으면 쑥 올라오던 콩나물의 긴 줄기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고 한 움큼 뽑아 냈어도 시루에는 전혀 흔적이 없던 것이 신기했다. 촘촘히 시루를 가득 채운 콩나물을 나도 한 움큼 뽑고 싶은 충동을 받았었는데 드디어 해봤다. 날씬하게 쭉 자란 상큼한 콩나물의 잔뿌리를 잘라내고 어떻게 먹을까? 궁리하며 우선 냉장고에 보관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요리법은 상상외로 쉬웠다. 내가 콩나물밥을 만들었던 적이 있나? 생각하니 오래전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 적에 먹었던 것 같았다. 당장 먹고 싶었다. 서둘러 쌀을 씻고 그 위에 당근과 표고버섯 썬 것을 얹어놓고 콩나물을 끓는 물에 데쳐내서 찬물에 담궜다. 그리고 데친 물을 식혀서 밥물로 만들고 전기 코드를 꽂았다. 어둡지만 뒤뜰의 채소밭에 가서 쪽파와 부추 조금 가져와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밥이 되자 그것을 조금 볼에 담고 그 옆에 찬물에서 건져뒀던 콩나물을 보태서 위에 양념장을 얹었다. 남편의 볼에는 내 양의 반을 넣어서 테이블에 놓고 남편을 불렀다. 밤 11시가 되어가는데 무슨 일이냐며 부엌으로 온 남편은 자기 앞에 놓인 콩나물밥 볼을 보더니 의자에 앉지 않고 이것이 무엇인지 눈으로 물었다. 사실 어려서 일본을 떠나 미국에서 70년 이상을 산 남편은 나를 만난 후부터 한식은 좀 먹지만 콩나물밥은 생전 처음 보는 눈치였다.
“맛있는 콩나물밥!” 외치며 나는 내 볼에 스푼을 넣어서 비볐다. 그리고 남편의 볼에 있는 밥도 비벼주고 먹어보라고, “맛있다” 연발하니 한 숟갈 떠 먹고 나를 보고 또 한 숟갈 먹더니 볼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가 맛있는 것 혼자 많이 먹어라 하고 테이블을 떠난 뒤 나는 고요한 야밤에 선배의 사랑과 향수가 담긴 콩나물밥을 먹었다. 꿀맛으로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