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 배우기 (51)
허먼은 커다란 수컷 악어이고 로지는 가녀린 암컷 사슴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보면, 허먼과 로지는 먹이 사슬에 놓인 관계처럼 보인다. 호주에 사는 작가, 거스 고든이 쓰고 그린 그림책 의 두 주인공, 허먼과 로지는 정글 같은 도시를 살아가는 너무나 인간적인 도시 서민들이다. 그림책은 먼저 한 도시에서 살지만 서로가 모르는 타인으로 각자가 보내는 일상을 찬찬히 보여준다.
허먼은 뉴욕에 있는 작은 아파트 7층에 살며 화분 가꾸기, 오보에 연주하기, 보이젠베리 요구르트, 겨울날 핫도그 냄새, 바다에 관한 영화 보기를 좋아하고, 로지는 옆 아파트 5층에 살며 팬케이크, 오래된 재즈 음악 듣기, 여름날 산들바람, 이에 달라붙는 토피 사탕, 비상계단에 앉아 노래 부르기… 그리고 바다에 관한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허먼과 로지는 시끄럽고 활기찬 도시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만 외롭다.
허먼과 로지는 같은 식당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음식을 먹기도 하고, 같은 길을 지나다니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도서관에 가기도 하지만 모르는 타인일 뿐이다. 이렇게 각자의 일상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둘은 음악을 통해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로지의 노랫소리와 허먼의 오보에 연주를 서로 듣고 좋아하지만, 만나지는 못한다. 그 사이, 허먼은 회사에서 느닷없이 쫓겨나고, 로지는 노래하던 재즈 클럽이 문을 닫아 가장 좋아하는 일을 못 하게 된다. 로지는 좋아하는 재즈를 부르기 위해 도시 외곽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재즈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다.
둘은 각자 자신의 방에서 무기력한 몇 주를 보낸다. 도시는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지만 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하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 걷고 또 걷다가 어쩌다 같은 곳에 멈춰서 핫도그를 하나씩 먹고 뒤돌아서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허먼은 옥상으로 올라가 오보에를 연주하고 오랫동안 그 멜로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로지가 그 음악 소리를 따라가 마침내, 허먼과 로지가 만난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망만 쫓으며 살아가는 도시라면 그곳이 바로 정글일 것이다. 모두가 타인인 도시에서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법칙이 될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외로움은 인간의 공생을 위해 신이 남긴 선물이 아닐까?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인간이다. 하늘 위와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며 잘난 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우주에 나와 똑같은 이는 없으니 오직 하나뿐인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다. 원초적으로 타인과 세상과 구분된 오직 하나뿐인 존재니까.
원래 밥 먹듯이 외로움을 먹고 사는 인간이지만 한적한 시골보다 많은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도시에서 인간은 더 외롭다. 물리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깊이 있는 감정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담 너머 옆집이 들여다보이는 시골과 달리 도시의 집들은 벽으로 막혀 익명성이 보장된다. 표현의 자유가 강조되는 세상이라 익명성은 지켜야 한다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도우려는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연대가 약해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가족, 이웃, 사회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할 공동체를 인터넷에서 찾는다. 인터넷에는 다양하고 글로벌한 공동체가 너무 많이 존재한다. 주어진 공동체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아 옮겨 다니면 된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한 교류는 얕고 피상적이기 쉽다. 쉽게 맺고 쉽게 끊기는 공동체이다. 인간은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도시의 삶이 그렇듯 점점 더 외롭다.
그래도 괜찮다. 사람은 외로워야 한밤에 들리는 노랫소리를 꿀을 듬뿍 떠먹는 맛이라고 느끼고, 노래를 쫓아 뛰고 달리고 기어올라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테니까. 외로움을 느끼고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