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셔츠에 정장 바지, 벨트까지 둘러주고 방을 나서 화장실로 향한다. 파마한 머리에 헤어 왁스를 슬쩍 발라주고 억지로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연출을 하고서야 멋쩍게 걸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마치 옛날 남성복 광고에서 연예인이 공중에 한번 날리고 입듯이 재킷을 걸치고 아빠의 정장 구두로 패션을 완성해 준다. “이따 만나요”라고 짧은 인사를 건네며 윙크를 찡긋하더니 차를 몰고 먼저 집을 나선다. 이렇게 수트를 차려입으니 철없던 막내아들이 제법 어른으로 성장한 듯하다. 웃음기 있는 baby face가 이젠 정돈된 근육과 함께 남성미를 물씬 풍긴다.
세 아이를 낳은 나에게 누군가 그랬다. 막내는 형제들 사이에서 그냥 큰다고… 그러나 예외는 늘 있는 법, 무난했던 두 형과는 달리 셋째는 일찍부터 심하게 사춘기 아니 삼춘기부터 시작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남다른 자기주장을 펼치고 고집을 피워 당황했던 적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쉽지 않았다. 타이르고 달래다가도 힘에 부치고 지칠 때면 휘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 셋 모두 성향도 다르고 나이대도 달라 엄마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했다. 체력과 에너지가 고갈되고 바빴던 시기여서 막내의 막무가내는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았다. 제대로 맛보는 육아의 매운맛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코비드-19는 상황을 더욱 험난하게 몰고 갔다. 아이는 자기 방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무기력해졌다. 코비드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 대면수업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는 밤낮이 바뀐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와 아침이면 늘 전쟁이었다. 힘겨운 하루가 가고 다음 날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다.
금쪽이의 오은영 박사 이야기나 육아 영상들, 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버텨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아득했고, 당장 눈앞에 닥쳐있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아 허우적거렸다. 컴컴한 가운데 작은 희망이라도 놓칠세라 눈을 번쩍 뜨고 한쪽 팔로 앞을 더듬으며 다른 한쪽 팔로는 옆에 있는 아이를 붙들고 힘겹게 걸어갔었다. 내 뜻대로 아이가 따라주지 않았을 때, 인내심 부족했던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기다려주지 않고 조급해하며 끌고 갔다. 아이는 그럴수록 멀어져갔고 부모와의 대화를 차단했으며 방문을 잠그고 좁은 공간에 자기를 맡겼다. 매듭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대화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서로 놓아버리고 무관심으로 회피했으며 결국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막막한 순간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진리를 마음속에 되뇌었다. 인내하고 시간 앞에 버티다 보니 좋은 기운이 점차 스며들었다. 어둠의 소굴이었던 칙칙하고 습한 동굴은 결국 작은 통로를 숨기고 있던 터널이었다. 아이에게 통한 사랑의 실천 방법은 역시나 따뜻한 말과 행동이었다.
이솝우화 ‘해와 바람’에서는 누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지 서로 내기를 한다. 매서운 바람은 추위 안에서 옷깃을 더 움켜쥐고 여미게 할 뿐이었고,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게 하여 해님이 이긴다는 이야기다. 잘못을 지적하며 큰소리치고 내 감정을 앞세웠던 점을 깨닫고 진심 어린 말과 스킨쉽으로 햇볕처럼 다가가도록 노력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며 쑥스러워했지만, 서서히 마음이 녹고 잠겨있던 빗장이 풀렸다. 마음속의 문이 열리자 전기장판의 스위치가 켜진 듯 빠르게 온기가 퍼져 나갔다. 방문을 열어놓고 수시로 대화하며 양팔 벌려 안아주고 공부하는데 옆에 앉아있으라며 의자를 내어주기도 하는 변화가 보였다. 이렇게 세상 다정한 아이가 혹독한 사춘기를 홀로 외롭게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준비한 공연을 선보이는 날이다. 아이는 오케스트라 퍼커션 단원이다. 많은 오케스트라 아이들 중에 제일 뒤에 서서 비트감있는 타악기 연주를 한다. 긴 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자기 파트에 정확하게 박자 맞춰 들어가 음악에 멋진 양념을 더해주는 역할이다. 어느새 성장해서 가정에서나 학교와 사회에서 본인의 길을 적극 찾아 나선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따뜻한 햇볕으로 키운 아이가 인생의 작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