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목사, 교수 등 미국 이민생활에 성공한 한인 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반드시 나오는 대목이 있다. 푸드스탬프(food stamp) 이야기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 때 애가 태어나서, 공부나 취업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또는 사업에 실패하거나 예상치 못한 실패를 겪었을 때…한인들은 그때를 이렇게 말한다. “푸드스탬프 없었으면 가족들 쫄쫄 굶었을 거에요.”
요즘은 ‘영양보조프로그램’(SNAP)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많은 한인들은 아직도 ‘푸드스탬프’라고 부른다. 그러나 11월부터 푸드스탬프와 EBT카드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11월부터 푸드스탬프(SNAP) 예산 집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주도한 ‘크고 아름다운 법’(BBB)을 민주당이 반대해 연방정부가 ‘셧다운’됐다는 이유다. 이에 따라 푸드스탬프를 받은 미국인 4200만명이 ‘배를 쫄쫄 굶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연방 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에 긴급 자금 집행을 명령했고, 최악의 위기는 벗어났다.
그러나 푸드스탬프 임시 자금 집행은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예산 복원 없이는 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연방정부 예산이 줄어든 가운데, 조지아 주정부는 예산이 남아도는 가운데에서도 푸드스탬프와 같은 EBT카드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주에서만 550만 명이 ‘캘프레시’(Calfresh,푸드스탬프의 캘리포니아 명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개빈 뉴섬 주지사가 비상기금 투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캘리포니아주 복지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생활비가 전국 최고 수준인 캘리포니아에서 가구당 월 250달러의 지원금은 이미 최소한의 생존선에 불과하다.
모든 한인들은 성공을 꿈꾸며 미국에 온다. 그러나 생각대로 안되는 것이 이민생활이다. 불의의 사태에 처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한인과 같은 이민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푸드스탬프’다. ‘사람이 최소한 굶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많은 저소득층 가정이 푸드스탬프를 잃게 되면 그만큼 가정 형편이 나빠지고, 월세나 약값, 전기세도 밀리게 되며, 결국 한 가족의 삶이 붕괴된다.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Robert Wood Johnson Foundation)의 제이미 부셀(Jamie Bussel) 선임국장은 “배고픔은 식품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거·의료·고용·교육 불평등이 얽힌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 위기가 단기적 셧다운을 넘어, 푸드스탬프 제도의 근본적 축소를 예고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초 통과시킨 BBB는 앞으로 10년간 SNAP 예산을 2870억 달러 삭감하고, 근로 요건을 강화해 지원 자격을 제한한다. 예산정책연구소(Center for Budget and Policy Priorities)의 조셉 요브레라(Joseph Llobrera)선임연구원은 “연방정부가 셧다운을 빌미로 국민의 식탁을 인질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일부에서는 ‘게으른 특정 인종이나 불법체류자가 푸드스탬프를 악용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푸드리서치·액션센터(Food Research & Action Center)의 지나 폴라타-니노(Gina Plata-Nino) 국장에 따르면, 푸드스탬프 수혜자는 백인 35%, 흑인 26%, 히스패닉 16%, 아시아계 4%로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한인마트나 주유소에 가면 SNAP 덕분에 나온 ‘EBT 카드’로 식료품을 구입하는 한인들이 수두룩하다. 이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푸드스탬프/SNAP/EBT 혜택을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한인들이 ‘푸드스탬프 악용자’라는 말인가.
푸드스탬프 중단은 미국 사회 전체의 위기다. 이민자, 아동, 노인, 장애인, 근로빈곤층이 주요 수혜자인 이 프로그램의 축소는 사회 안전망의 근간을 흔든다. 연방법원의 긴급 판결로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매달 80억 달러가 투입되는 SNAP은 단순한 복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마지막 생존선이다. 정치적 셈법이 국민의 생존보다 우선시되는 현실에서, 한인들은 4200만 명의 굶주림을 해결할 것을 정치권에 요구해야 한다.